안녕하세요 에듀몬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관학인 성균관의 제도와 성격, 교원 및 입학자격 등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성균관의 교육과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대학지도(大學之道) 교육
조선 초기의 신진사대부들은 성리학 사상을 토대로 하여 조선사회를 이러한 사상에 어울리는 사회로 건설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이 당면한 문제는 왕권을 강화하고 불교에 빠져있는 고려의 권문세족들을 억누르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안정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성리학 이념을 확산시키면서 사회교화를 담당할 교육기관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중앙 무대에 있는 성균관이 관학의 중심지로서 중요시되었으며, 국학으로서의 최고 학부라는 상징적인 면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성균관(成均館)은 자연스럽게 조선 건국 후에 국가이념인 성리학을 연구하고 보급하며, 수호하는 기관으로 자리매김되었습니다. 특히 과거제도의 정착으로 인해 성균관의 기능은 관리 양성의 기능까지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성균관을 “성현(聖賢)을 봉사(奉祀)하는 사묘 (祠廟)의 기능을 겸비한, 고급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112)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성균관 교육의 일차적 목적은 유학의 최고단계인 대학지도(大學之道)를 성취하는 데에 있습니다. 조선 초에 편찬된 『속육전(續六典)』이 이러 한 사실을 밝혀준다.
8세 이상은 모두 학당에 들어가서 소학지도(小學之道)를 배우고 15세 이상이 되어 소학의 공을 성취하면...... 성균관에 올라서 대학지도(大學之道)를 배우게 된다.
성균관 유생들이 공부하는 교과는 경전류(經典類), 자집류(子集類), 사기류(史記類), 고문류(古文類), 편찬서류(編纂書類) 등과 시부(詩賦)등의 제 술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노․장․불경(老․莊․佛經)․잡류(雜流) 등은 읽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 가운데서 성균관 유생들의 교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학의 기본서인 사서오경(四書五經)입니다. 사서오경은 성균관 유생의 교육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교재였으며 또한 과거시험에 필요한 과목의 하나였습니다. 사서오경(四書五經)은 조선 건국 초에 제정한 승재법[陞齋法, 후에 구재법(九齋 法)으로 명칭이 변경]에 성균관 유생 교육의 기본교육 과정으로 명문화되었습니다. 승재법(陞齋法)은 사서와 오경을 각(各)서(書) 별로 9단계로 편성하는 것입니다. 즉 성균관에 입학하면 처음 대학재(大學齋)에 들어가는데, 대학재(大學齋)에서 『대학(大學)』을 통하게 되면 예조에서 시행하는 시험에 합격할 경우 논어재(論語齋)로 올라가고, 논어재에서 『논어(論語)』를 통하면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방식으로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조에서는 관원 1명과 대간(臺諫 :사헌부, 사간원)의 관원 각각 1명씩을 성균관에 보내어 성균관의 관원과 함께 학생을 강문(講問)하여, 강설(講說)이 자세하고 명확하여 전체의 뜻을 잘 파악한 자는 다음 단계로 올라가게 하고, 통하지 못하는 자는 통(通)할 때까지 해당 재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대학재(大學齋)→논어재(論語齋)→맹자재(孟子齋)→중용재(中庸齋)→예기재(禮記齋)→춘추재(春秋齋)→시재(詩齋)→서재(書齋)→ 역재(易齋)의 차례로 이수토록 하였습니다. 요약하면 승재법(陞齋法)은 사서오경을 그 특성에 따라 각각 재(齋)로 편성한 단계적 학습 방법이었습니다. 이리 하여 사서오경을 통한 자는 명부에 기재하여 성균관에 보관하였다가 식년 (式年)에 예조에 보고하고 예조에서는 이것을 왕에게 보고하여 문과 초시를 보게 하였습니다.
각 과목의 학습 기간은 『태학지(太學志)』115)에 의하면 『대학(大學)』 1개월,『중용(中庸)』2개월,『논어(論語)』․『맹자(孟子)』 각 4개월,『시경 (詩經)』․『서경(書經)』․『춘추(春秋)』 각 6개월,『주역(周易)』․『예기 (禮記)』 각 7개월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하여 매월 초순에 예조와 성균관의 당상관(堂上官)이 동석하여 고강(考講)하되 그 성적을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4단계 평가로 명부에 기록해 두었다가 식년에 이르러 사서와 1경 이상의 분수를 통산하여 성적 우수자 5명을 가리어 회시(會試 : 복시)를 보게 하였습니다. 9재(齋)의 최종단계인 역경재(易經齋)를 마치면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게 됩니다. 이는 사서오경을 중심으로 성균관 유생의 교육을 시행하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
구재법(九齋法)은 성균관 유생이면 누구나 먼저 대학재(大學齋)에 들어가고 『대학(大學)』을 배워 통하면 그다음에 차례로 논어재․맹자재․ 중용재․예기재․춘추재․시재․서재․역재로 올라가는 제도였습니다. 각각의 단계에서 시험을 보고 그 결과에 대한 명부를 만들어서 성균관에 보관했다가 식년(式年)의 과거시험 때 예조에 보관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구재(九齋)는 성균관의 교육을 유학의 경전인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중심으로 하나의 서책으로 재를 만들어서 단계적으로 성취하게 하고 이를 다시 과거시험에 반영하는 이른바 학교교육의 충실화를 가져오고 관리 선발에 신중을 가할 수 있는 다목적 제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성균관의 구재법(九齋法)이 시사하고 있듯이 성균관은 근본적으로 관리 양성의 목적에 따라 제도적으로 정비된 교육기관이었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태조가 즉위하면서 교서에서 밝힌 학제와 과거제의 개편이라는 개혁 안에 배태되어 있었습니다. 이 교서에서는 고려시대 관리 선발의 중심이었던 좌주문생제도(座主門生制)와 감시(監試)를 폐지하고 관학을 정비하여 성균관의 정록소(正錄所)와 장이소(長貳所)에서 직접 과거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학제와 과거제가 성균관의 교육과 과거제를 연결시키게 하였던 것입니다.
성균관 유생들에게 사기 진작의 차원에서 과시특전과 공천을 부여하였는데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성균관의 인재 등용의 기능을 반영한다고 하겠습니다. 과시 특전으로는 관시(館試), 알성시(謁聖試), 도회(都會), 절일시(節日試), 황감시(黃柑試), 전강(殿講), 도기과(到記科), 정시(庭試) 등이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관시는 성균관 유생들만의 과거시험으로 문과의 초시(初試)에는 향시(鄕試)․한성시(漢城試)․관시(館試)가 있었습니다. 특히 관시 (館試) 같은 경우는 성균관 유생 200명 가운데서 원점 300점이 되는 유생들에게 응시 자격을 주어 50명을 선발하는 성균관 유생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알성시(謁聖試) 역시 왕이 석존제(釋尊祭)에 참석하거나 시학(視學)의 일환으로 성균관 유생에게 과거를 베푸는 것과 명나라에서 온 사신이 성균관의 문묘에 알성을 하고 베푸는 것으로서 성균관 유생을 위한 과거였습니다. 성균관 유생에게는 매년 2회의 도회(都會)가 있었는데 여기서 우등생으로 선발되면 문과의 복시(覆試)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절일시(節日試)는 성균관 유생에게 인일제, 삼일제, 칠석제, 구일제 등 절목마다 과거시험을 보게 한 것을 말하고, 황감시(黃柑試)는 제주 목사가 왕에게 바치는 감귤을 성균관 유생에게 나누어줄 때 실시하는 과거시험입니다. 전강(殿講)은 매년 2, 4, 6, 8, 10, 12월의 16일 실시하는 성균관 유생을 위한 과거이고, 도기과(到記科)는 원점 30점 이상인 유생이 볼 수 있는 과거였습니다. 정시(庭試)는 매년 봄가을에 성균관 유생을 전정(殿庭)으로 불러 실시한 과거였습니다.
공천제도는 매년 세초에 생원을 대상으로 자치적인 천거방법에 의해 실시되거나, 장이소(長貳所)의 대사성 이하 관리들에 의해 연령, 덕행, 제술, 고장의 성적, 원점의 다소에 따라 심사되어 경관직에 서용되는 제도였습니다.
이상에서 성균관은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조선사회를 유지하게 하는 유교사상의 연구소이자 보급소이었으며 수호자의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고, 성균관의 각종 교육과정이 과거제도와 연결되면서 동시에 인재등용의 기능을 담당하는 교육기관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2. 성인(聖人)·군자(君子)교육
성균관 교관의 교육적 역할은 조선 사회가 당면하고 있던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이해되어야 합니다. 조선은 불교를 근간으로 하던 고려사회를 해체하고 성리학 사상을 통한 새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사대적 사명을 안고 있었습니다. 즉, 성균관의 교관들은 유학사상의 보급과 진흥이라는 국가적 사명 속에서 그에 어울리는 인간 양성을 자신들의 소임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성리학은 그 성격 상 본원 유학에 대한 주자의 재해석에 의해서 체계화된 새로운 유학체계였습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공맹의 본원 유학 체계를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공자(孔子)의 사상은 군자를 중심으로 하여 예(禮), 인(仁), 학(學), 덕(德)을 두루 지닌 인간을 지향하는 사상체계이고, 맹자(孟子)는 인의(仁義)를 바탕으로 사단을 지닌 도덕적 인간을 지향하는 사상입니다. 이 들의 공통된 인간상은 성인(聖人)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인(聖人)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夫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의 ‘삼경(三 綱)’과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오륜(五倫)’을 정립하고 그것을 주장하는 유형의 인간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결국 조선사회는 모든 사람이 교화되어 성인처럼 한편으로는 삼강, 오륜과 같은 인간의 삶의 기준을 설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준들을 스스로 누구보다도 잘 지키는 인간이 되도록 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고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성균관의 교관은 건설적인 이념을 표출하면서 사회의 교화에 힘쓰는 한편 삼강, 오륜을 실천하는 인간을 길러내는 것을 그 당면과제로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교적 이상에 맞는 도덕적이고 이상적인 인간을 길러내는 데 힘썼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성균관에서 채택하고 있던 교육과정을 보면 성균관 교육이 우선적으로 이상적 인간을 길러내는 데 있었다는 것이 확인될 수 있습니다. 성균관의 주요 교육과정은 9과목으로 『대학(大學)』․『논어(論語)』․『맹자(孟子)』․ 『중용(中庸)』․『시경(詩經)』․『서경(書經)』․『예기(禮記)』․『춘추 (春秋)』․『역경(易經)』 등이었습니다.
이 가운데서 『대학(大學)』은 주자(朱子)가 말한 대로 ‘옛날 대학에서 사람을 가르치던 법’으로서 명명덕(明明德)․친(신)민[親(新)民]․지어 지선(至於至善)의 삼강령(三綱領)과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8조목 을 중심으로 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이상적 인간을 길러내는데 유익한 교재입니다. 『논어(論語)』는 인(仁)을 구하고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하며 본원을 기르는 공력에 대하여 정밀하게 생각하고 깊이 몸에 익히는 데 유익한 교재입니다. 『맹자(孟子)』는 의리(義理)를 밝히 분별하고, 인간의 사욕을 막고 천리의 공평한 이치를 살피고 확충하는데 유익합니다. 『중용(中庸)』은 인간의 성정(性情)의 덕과 미루어 지극히 하는 공부와 천지가 제자리를 얻고 만물이 생육하는 신묘한 이치에 대해 탐색하고 터득하는데 유익하며, 『시경(詩經)』은 인간의 성정(性情)의 정사(情思)와 선악의 포상과 징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여 (선한 마음을) 일으키고 (나쁜 마음을) 징계하는 데 유익합니다. 『서경(書經)』은 과거 성현이 다스린 커다란 경륜과 법에 대하여 일일이 그 요령을 알아 근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춘추(春秋)』는 성인이 선한 이는 상을 주고 악한 이는 벌을 주며 (악한 이를) 억누르고 (선한 이를) 북돋우며, 조종하는 은미한 말씀과 깊은 뜻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고 깨닫는데 유익합니다. 『역경 (易經)』은 길흉과 존망, 진퇴와 소장의 기미에 대하여 관찰하고 깊이 연구하는데 유익합니다.
『대학(大學)』을 통해서는 명덕을 밝히는 것(명명덕, 明明德)을 일차적으로 하여 친(신)민[親(新)民]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사실에서 볼 때 수기의 인간됨을 우선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기에서의 명덕(明德)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단 (四端)을 말하는데, 이것을 먼저 밝히는 것을 대학교육의 방도로 말한 이상 수기의 인간을 우선적으로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논어(論語)』의 예(禮)와 인(仁), 학(學)을 갖춘 군자의 인간상이나, 『맹자(孟子)』의 인의(仁義)를 통해 왕도를 실현하는 인군(仁君),『중용 (中庸)』이 강조하는 성정의 덕의 함양,『시경(詩經)』의 인간 성정의 정사와 선악에 대한 강조 등을 통해 볼 때 성균관의 교육과정 자체가 일차적으로 유교의 이념에 맞는 이상적 인간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 중에 한 사람인 정도전(鄭道傳)은 학교를 사회교화의 기구로서 인륜을 밝히는 곳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즉, 학교교육의 일차적인 목표는 인륜을 밝혀 사회를 교화시키는 인간을 양성하는 데 있다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은 것입니다.
실제로 태조 원년 9월에 배극염(裵克廉), 조준(趙浚)등은 상소(上疏)를 통하여 성균관의 교육목적을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하였습니다. 첫째 경서에 밝고 행실이 훌륭하며 도덕을 겸비하여 사범이 될 만한 자를 양성하는 것이었고, 둘째로 국가의 일에 대한 해결방안이 있고 능력도 갖추어서 업적을 세울 만 한 자를 양성하는 것이며, 셋째로는 문장에 익숙하고 문자와 서찰에 능해서 문서를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를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사회가 처해 있던 시대적 상황이나 신진사대부들의 정치적 입장, 그리고 성리학의 학문적 속성 등과 관련지어 볼 때 성균관 교관들은 일차적으로 사회교화를 담당할 이상적 인간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성균관이 채택하고 있던 교과과정의 특성에 따를 때 치인(治人)에 못지않게 수기(修己)의 인간이 될 것을 일차적으로 요구하였던 것이며, 정도전의 학교관이나 배극렴, 조준 등의 상소를 통해 볼 때 성균관의 교육목적이 일차적으로 이상적 인간 양성에 두고 있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이상적 인간상은 유학의 수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전인적이고 조화로운 성숙된 인간, 곧 성인(聖人)․군자(君子)였습니다. 성인은 유교의 이상적인 인격자를 가리키는 말로서 지혜와 덕이 비범한 경지에 이른 사람을 말하며, 군자는 덕성과 교양을 겸비한 사람의 범칭입니다. 따라서 성균관 유생들은 유학의 학문적 도통을 잇는 훌륭한 인인(仁人)을 추구하고, 현실적으로는 유덕(有德)한 치자(治者)로서의 위치에 나아가기 위해 성리학적 소양인이 되길 원했습니다.
성균관 유생들이 추구했던 이상적인 인간상이 성인(聖人)․군자(君子)이므로 성균관 교육의 목표는 유생들로 하여금 성인․군자가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조선조는 성리학의 특성상 수기치인 역시 성균관 유생들이 추구해야 할 교육의 목표였습니다.
3. 국가 인재양성 교육
성균관 유생의 교육에는 교재의 강의(講義)와 독서(讀書), 제술(製述)이 있었습니다. 제술(製述)은 문장을 작성하는 것으로 여러 형식이 있습니다. 성균관의 교육 방법 중 하나인 교육 일고(日考 :日講), 순고(旬考 :旬製), 월고(月考 :月講)그리고 삼일제(三日製)와 구일제(九日製)가 있었습니다. 삼일재와 구일재는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시행되어 춘추도시(春秋都試)라고도 하였는데 이때에는 의정부, 육조(六曹), 제관(諸館)의 당상관이 제술을 시험하여 그 성적을 학적에 기재하고 성적 우수자 3명을 가리어 바로 문과복시(文科覆試)에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주었습니다.
성균관의 교육은 1개월을 단위로 할 때 20일간은 경서를 배우고, 4일간은 배운 것을 고강(考講)하며 6일간은 삼장과문(三場科文)[제술(製述), 즉 과거시험의 삼장(三場)에서 글을 짓는다]을 배우도록 했습니다. 경서는 교관들이 능한 분야를 분담하여 강(講)하는데, 오전에는 훈도(訓導)하고 오후에는 그 날 배운 것을 고강(考講)하였습니다. 강(講)은 사정에 따라서 시경(詩經),강론경의(講論經義), 강경의(講經義), 횡경문난(橫經問難), 논란경의(論難經義), 토론경지(討論經旨), 문난문의(問難文義) 등의 다양한 방법을 썼습니다.
제술은 10일을 단위로 한 달에 3차에 걸쳐 2일씩 6일간 교육하였는데 첫째 날은 교관이 출제한 문제에 대한 답안을 작성하고 둘째 날은 교관이 유생이 작성한 답안을 고교(考校)하여 유생을 개별적으로 지도하였습니다.
성균관 학생들은 교과는 물론 실제 생활상 행동의 선행도 중요시하고 있었으니 반드시 재(齋)에 기숙케 하였으며, 미명(未明)에 북이 한 번 울 리면 기상하고, 평명(平明)에 북이 두 번 울리면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 독서하다가, 북이 세 번 울리면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합니다. 식사 후 명륜당에 올라가 대사성 이하 교수들에게 읍(揖)하고 강의를 듣고 저녁이 되면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하고 각각 방으로 들어가 복습하였습니다. 이것은 성균관 학생들의 반복된 일과였습니다.
그런데 식당에는 학생들의 명부가 비치되어 있고 학생들이 아침․저녁 식당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서명하였습니다. 이것을 ‘원점(圓點)’이라 하였는데 아침․저녁 2번 식당에 들어가 서명해야 원점 1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원점은 오늘날 학생의 출석 점수와 같은 것으로 생원, 진사로 하여금 성균관에 거관케 하기 위하여 제정한 것이며, 원점 3백 점을 취득한 자, 다시 말하면 성균관에 3백일 거관한 자라야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부여되었습니다.
조선 사회 건설의 새로운 주역이 되었던 초기 신진사대부들은 고려 말기의 사학(私學)의 폐단을 막기 위한 작업으로 성균관 교육의 개혁에 착수하였습니다. 그 일차적 시도는 성균관에 예속되어 있던 기술학(技術學)[유학 (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을 해당부서로 옮기고 유학 교육만을 전담하는 기구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균관에는 사서오경재(四書五經 齋)를 두고 유생의 정원을 100명에서 200명으로 증원하였고, 성균관 유생들에게만 과거 응시자격을 주게 하였습니다. 특히 고려시대의 좌주 문생제 (座主門生制)와 감시(監試)가 폐지하고 성균관이 그 대신 정록소(正錄所)와 장이소(長貳所)를 통해서 직접 과거 업무를 담당하게 되면서 성균관 교육과 과거제가 연결될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성균관의 인재등용 기능은 강화되었습니다. 이러한 개혁을 통해 신진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성균관을 근거로 좌주문생 관계를 맺어 세력을 강화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습니다. 성균관을 중심으로 하는 관학교육체제는 신진사대부들이 정치세력으로 부가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이념적․제도적 장치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려 말에서부터 성균관의 위상강화와 왕권강화를 위해 시작된 겸교관제(兼敎官制)는 조선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강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태조 때에는 정도전과 권근이 성균관 제조(提調)로 임명되어 유생들을 가르쳤고, 태종 때에는 참찬(정2품)권근이 겸대사성(兼大司成)에 임명되어 상근하게 되었습니다. 세종 때에는 홍문관이나 예문관의 대제학으로 하여금 성균관의 최고위직을 겸임케 하여 형식적으로 위상을 높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겸교관제는 권력집중의 표현으로서 관료체제 국가의 한 특징이었는데, 특히 정치후보자들을 교육하는 데 있어서 직접 정치 관료가 책임을 진다고 하는 것은 정교일치(政敎一致)라는 유학의 한 속성을 드러 내는 것이며 실관직(實官職)에 있는 석학 관료를 교육적으로 활용하는 이 중의 유익함이 있었습니다.
더욱이 성균관에는 왕세자(王世子)나 대군(大君)이 입학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문묘가 성균관에 있었기에 거기에서 입학례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왕세자의 입학은 성균관에 대한 조정의 관심을 보여주면서 장학의 의미가 깊었으며, 궁극적으로 성균관이 국가의 인재를 양성하는 곳임을 은연중에 시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균관 교관들은 다양한 과거시를 통해 유생들의 생활을 국가적 인재가 되도록 관리할 수 있었습니다. 성균관 유생들은 원점에 의한 출석 평가와 성적 평가에 따라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거나 과거 성적에 반영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균관의 장이소(長貳所)는 태조 대에 문과 초장의 업무를 관장하는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고, 정록소(正錄所)는 태조 5년부터 생원시 응시자에 대해 심사하는 것을 시작으로 태조 7년부터는 성균관 입학자에 대한 적격 여부 시험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업무를 성균관의 교관들이 담당하면서 유생들에 대한 교육평가는 점차 과거제도와 깊은 상관관계를 맺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평가를 통하여 성균관의 교관들은 이상적 인간의 양성 못지않게 국가를 위한 인재양성의 교육을 실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균관 교관은 교육규칙을 통해서 유생들을 국가적 인재가 되도록 교육하였습니다. 유생들에게는 다양한 교육규칙이 있었습니다. 학습 전의 규칙으로는 매일 날이 밝기 전 첫 번 북소리에 따라 기상하고, 둘째 북소리에는 의복을 단정히 하여 독서하고, 셋째 북소리에는 식당에서 동서로 마주 않아 식사를 하였습니다. 정록소의 학정(學正), 학록(學錄) 등은 유생들의 잘잘못을 평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학습행사의 경우에는 먼저 학관이 명륜당에 임하면 유생이 읍례를 청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첫 북소리에 모든 유생이 뜰에 들어와서 각각 앞으로 나란히 앞으로 나아가 서로 예를 했으며, 학관(學官)앞에서 그날의 강의를 청했습니다. 둘째 북소리에 모든 유생은 읽는 책을 가지고 각각 사장에게 나아가 앞서 배운 것을 논의하여 의문점을 해결한 후 새 것을 배웠습니다. 물론 이러한 학습행사에 대해서도 정록소에서는 일일 이 평가하여 선악부에 기록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균관 교관은 이른 아침부터의 일상생활에서 학습하는 순간순간의 생활을 모두 평가하여 유생들로 하여금 국가의 인재가 되도록 하는 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교육적 벌칙으로는 비루한 언행을 했을 경우, 명예를 훼손했을 경우, 소인배의 심성으로 행동했을 경우, 나태하거나 산만한 행위를 했을 경우, 유희 행위를 했을 경우, 예의를 잃어버렸을 경우, 식당에서 차례를 지키지 않거나 떠들었을 경우, 성적이 불통인 자 등을 처벌하였습니다. 이러한 규제를 통해서 유생들은 관학의 이념에 맞추어 일정한 궤도의 생활을 하도록 요구받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국가가 요구하는 인간상에 맞추어 관료의 일원으로서 타인을 통치할 실력을 갖추도록 요구받고 있었습니다.
이상을 통해서 성균관 교관의 역할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에서 국가를 위한 인재양성을 교육의 목표로 하고 있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성균관이 신진사대부의 조선사회 건설과 그들의 정치적 안정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교육기관으로 인정되었다는 사실과 관련지어 볼 때 성균관 교관은 국가와 사회를 위한 인재양성을 교육의 목표로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정교일치(政敎一致)의 측면에서 국가의 고위관리가 성균관의 대사성을 겸직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관련지어 볼 때 성균관 교관의 교육 역할이 국가의 인재양성에 있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셋째로, 성균관에 왕세자나 대군이 입학하였다는 사실과 성균관 유생에게 과거 응시자격이 주어졌다는 사실에서 볼 때 성균관 교관은 인재양성에 주력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넷째로, 과거 응시에서 원점과 성균관에서의 교과 성적이 과거시험에 반영되었다는 사실과 관련지어 볼 때 성균관의 교관들은 유교적 이상의 인간 양성과 더불어 국가적 인재양성의 역할을 지니고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학습 전의 행사와 학습행사가 모두 평가의 대상이 되어 과거시험에 반영되고, 잘못된 행위에 대해 일일이 평가하면서 그 결과를 모두 과거에 연결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성균관 교관은 유생들을 당연히 국가의 인재가 되도록 교육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참고문헌: 조선시대 교육기관의 실제와 현대적 시사점 연구(한민석,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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