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에듀몬입니다.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조선시대의 중앙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인 관학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크게 향교, 4부 학당, 성균관으로 나누어 알아보았는데요. 이번 시간부터는 조선의 사학(私學)에 대해 알아볼 것이며,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가장 유명한 서당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서당의 기능
서당(書堂)의 기원은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나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지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기록된 “여염집들이 있는 거리에는 경관(經館)과 서사(書社)들이 두셋씩 마주 바라보이고, 이곳에 백성들의 자제들이 무리로 모여 스승에게 경을 배우며…”라는 기록을 통해서 볼 때 고려시대에도 이미 서당과 같은 민간 교육기관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조선전기까지 초등교육은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아이들은 가정에서 한문 해독의 능력을 갖춘 다음 서재(書齋) 형태의 사설 교육기구나 관학(官學)인 향교를 통해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교육과정을 밟았습니다. 이 서재(書齋)에는 오늘날 초등 수준의 교육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서당은 서재(書齋)가 그 전신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권근(權近)이 상계한 「권학사목(勸學事目)」을 보면 서당의 성격을 보 다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조 때 지방에 있던 여유 있는 유신(儒臣)들이 서재를 사적(私的)으로 세워 후진을 교육하였는데 스승과 학생이 각각 그 자신의 소임을 지켜서 그 학문을 성취하는 것으로 편안해하였습니다. 지금은 스승 된 선비가 혹 다른 곳의 교수로 임명되어 가족과 집을 버리고 헤어지게 되어 생업을 폐하는 실정입니다. 지금부터는 지방의 유신자로서 사재를 설립해서 교훈하고 있는 사람은 함부로 다른 지역(주)의 선생이 되도록 정하지 못하게 하고, 생도도 억지로 (관학인) 향교에 입학하게 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즉, 고려시대에 이미 서재(書齋)가 있었으며, 그 후 선생들은 개인적으로 서재를 세워서 생도들을 교육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합니다. 그리고 당시 조선조에서 유신(儒臣)들에게 본인의 연고를 고려하지 않고 다른 지역의 교수(敎授)가 되도록 함으로써 가족과 살던 곳을 떠나야 하는 폐단이 나타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학생들도 억지로 향교로 들어오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부연하고 있습니다.
성종 3년에는 성종이 경기도 관찰사에게 보낸 서찰에서 서당이 사설 교육기관이었음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들으니 전서 부령 유인 달이 광주에서 따로 서당을 세우고 가르치기를 열심히 하여 게으르지 않아서 그 고을의 자제들이 서로 모여 수업을 받아서 생원․진사가 그 문하에서 많이 나왔다고 하던데 정말 그러한가. 경은 친히 방문하여 그 허실을 밝히라.”
이상에서와 같이 서당은 대체로 서재를 전신으로 하는 기초교육기관이며 개인적으로 설립하여 운영하는 사설 교육기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 16세기에 이르러 사림파가 등장하면서 서당의 사회적 의미는 증대되어 갔습니다.
2. 서당의 설립
1) 서당의 유형
서당의 설립은 설립주체에 따라 다양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훈장이 독자적으로 설립하여 운영하는 훈장자영서당(訓長自營書堂)이 있었고, 마을에서 가세가 넉넉한 사람이 자기 자제를 교육시키기 위해 훈장을 단독으로 초청하여 경비 일체를 담당해가는 유지독영서당(有志獨營書堂)이 있었습니다. 또한 마을의 유지 몇 사람이 조합해서 훈장을 초빙하여 조합원의 자제를 교육시키는 유지조합서당(有志組合書堂)이 있었고, 마을 사람 전체가 합심하여 훈장 및 교육에 대한 경비를 공동으로 분담하고 그 마을의 자제는 누구나 들어가 공부하게 하는 촌조합서당(村組合書堂)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서당은 특히 향촌사회에 생활근거를 둔 사족과 백성이 주체가 되어 면(面)․동(洞)․리(里)를 기본단위로 설립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당의 설립 자체가 국가의 지원이나 간섭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나라가 요구하는 훈장에 대한 일정한 자격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2) 서당의 구성
서당(書堂)은 대체로 훈장(訓長)과 접장(接長), 생도(生徒)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훈장(訓長)은 주석이나 언해를 참고하여 경서의 뜻만 파악하는 정도면 충분하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학식이 높고 덕망이 높은 선비들은 관직에 진출하거나 지방에서는 향교나 서원의 교관에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이들을 제외하고 훈장의 역할을 담당하는 자들은 학식이나 덕망이 별로 높지 않고 경사 백가(經史百家)에 능한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접장(接長)은 규모가 큰 서당에서 임명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훈장이 서당의 일을 혼자 맡아보기 어려운 경우에 우수한 학도를 그들의 장(長)으로 삼은 자를 말합니다. 학력과 연령이 높은 학도가 접장을 맡았으며, 서당 내 하급 자를 훈장 대신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생도들과 직접 생활하기도 하였기에 서당의 풍속에 대해서는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습니다.
학도(學徒)는 보통 8~9세에서 15~16세 사이의 아이들이 중심이고, 20세 이상의 자도 있었습니다. 서당의 교육대상에 대하여 『경외 학교 절목(京外學校節目)』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몽훈도에…… 사족(士族)과 범민의 자제 중 8~9세에서 15~16세에 이른 자를 모아놓고 먼저 소학(小學)을 가르쳤다……
즉 서당의 학생들은 사족(士族)이나 상민(常民)의 자제를 구분하지 않고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에 따라 서당의 학도들은 학력이 각기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훈장이 모든 학생에게 일률적으로 교육을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서당의 교육은 설립 과정에 자유롭고, 훈장의 자격이 비교적 자유로웠으며, 입학하는 학생들이 다양한 계층의 제한이 없이 입학하고 있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역설적으로는 서당의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그만큼 자율적인 교육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서당의 설립, 교과과정, 평가 등의 전 교육과정이 거의 훈장의 자율에 따라 이루 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 참고문헌: 조선시대 교육기관의 실제와 현대적 시사점 연구(한민석,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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