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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론

조선시대 교육 알아보기: 서당의 교육과정

by 신박에듀 2020.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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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에듀몬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학인 서당의 기능과 성격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이번 시간에는 서당에서 어떠한 것을 가르치고 배웠는지, 교육과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기초 문자 교육

 

  국가적으로 조선왕조는 유교를 정치(政治)․교육(敎育)의 이념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조선의 교육은 유교 사상에 입각하여 국민예속(國民禮 俗)의 교화(敎化)와 국가의 정무체제(政務體制)에 필요한 관리양성을 목적으로 하여 건국 초부터 크게 장려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조 사회는 신분 사회로서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신분이 사족(士族)으로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 평민층에서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상식 함양에 교육의 목적을 두어 일반교양이나 생활의례 및 관혼 상제(冠婚喪祭)에 대한 이해의 수준으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서당(書堂)은 비록 국가의 재정적인 지원은 받지 못했으나 동몽(童蒙)의 교육기관으로서 사족(士族)과 평민의 자제를 입학시켜 한자 교육과 윤리 교육의 보급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서당(書堂)의 교재는 학습 단계에 따라 문자 교육용 교재와 훈석(訓釋) 단계의 교재로 구분될 수 있으며, 이 가운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천자문(千字文)』,『유합(類合)』, 『훈몽자회(訓蒙字會)』등이 있습니다. 특히 최세진은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 아동에게 가르쳐야 할 책의 순서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습니다.

 

아동을 가르치는 책의 순서는 반드시 『천자문(千字文)』을 먼저 하고 다음에 『유합(類合)』을 한 연후에야 다른 책을 읽기 시작한다.

 

  즉, 『천자문(千字文)』을 먼저 학습하고, 그 다음에 『유합(類合)』을 학습한 후 제서(諸書)를 읽도록 한다 하였습니다.

  『천자문(千字文)』은 한자를 배우는 입문서로서 오늘날에도 널리 사용 되고 있는 것인데 중국 양(梁)나라 때 무제(武帝)가 주흥사(周興嗣)를 시켜 일천자(一千字)로 만든 시집입니다. 『천자문(千字文)』의 교육은 처음에 정독으로 한자 한자씩을 가르쳤고, 다음은 단자(單字)를 붙여 음독(音讀)하는 것을 가르치고 다음에는 구독(句讀)의 문리(文理)를 가르쳤습니다. 그 다음에는 한 장의 대의(大義)를 가르쳐서 마지막에는 자독자해(自讀自解), 즉 학습자 스스로 풀이하여 읽도록 했습니다.

  『유합(類合)』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책이나 그 편저자는 확실치 않은데 1,512자의 한자로 되어 있어 『천자문(千字文)』과 공통되는 부분을 복습하면서 900자를 새로 배우는 한자 공부 교재였습니다.『유합(類合)』은 한국 속자를 수록하고 있고, 천자문보다 512자가 더 많으며 600자가 공통으로 나오고 천자문을 배웠다면 공통되는 한자를 복습하면서 900자를 새로 배우게 됩니다. 모든 한자는 서명이 뜻하는 바와 같이 의미와 내용에 따라 유별되며 4자 성구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유합(類合)』의 교육은 한자에 토를 달아 읽고 이어서 뜻을 새기는 방식으로 음독(音讀)과 해석(解釋)하는 학습을 하게 하였습니다. 훈장이 음독을 선창하고 나면 생도는 따라서 음독을 하였습니다. 훈장이 해석을 먼저 한 두 번 해주고 학생이 해석을 해보도록 하였으며 음독이 다 되어야만 해석을 훈장이 해주고 익혔습니다. 생도의 음독이 안 되면 계속 읽히고 읽어서 외우게 하였습니다. 음독은 30번 이상 해석은 10번 이상으로 하였습니다. 자형(字形)은 교재의 한자를 보면서 익혔고 자형을 읽히면서 붓글씨 공부를 하였습니다. 결국 『유합(類合)』교육을 통하여 자형과 이름을 익힐 수 있게 하므로 모든 한자 공부에 기초가 되었습니다.

  서당의 학과로는 강독(講讀)․제술(製述) 및 습자(習字)의 3과가 있었습니다. 강독(講讀)은 『천자문(千字文)』,『유합(類合)』,『동몽선습(童蒙先 習)』등을 기본으로 하고 우수한 학도들이 있거나 훈장이 훌륭한 경우에 는 그 이상 『사서(四書)』,『소학(小學)』,『통감(通監)』 등을 가르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제술(製述)은 오․칠언철구(五․七言絶句), 사율(四律)과 고풍(古風), 십팔구시(十八句詩) 작문 등이었으며, 서당과 훈장의 품위에 따라서 각종 문체를 연습하기도 하였습니다. 습자(習字)는 해서(楷書)와 행서(行書), 그리고 초서(草書)로서 자획(字劃)이 갖추어지면 책을 베끼는 것과 서찰체(書札體)의 연습으로 실용에 힘쓰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이 가운데서 습자는 특히 생활의 기본문자를 익히는 데 유익하였을 뿐만 아니라 먹을 갈고 글자를 익히는 동안에 인내심과 공경함 및 집중력 등까지도 수련 할 수 있는 유익한 학과라고 할만합니다.

  훈장은 생도들에게 단계에 따라서 글자를 깨우치게 하였습니다. 즉,『천자 문(千字文)』 같은 것으로 단자(單字)를 가르치고,다음에 『천자문(千字 文)』이나 『동몽선습(童蒙先習)』 같은 것으로 단자(單字)를 붙여서 음독 (音讀)하는 것을 가르쳤으며, 다음에 구독(句讀)의 문리(文理)를 가르치고, 다음에 일장(一章)의 문의(文意)를 가르치고, 다음에는 교관 없이 자독자 해(自讀自解)하게 한 것입니다.

  훈장은 또한 학습능력에 따라 학도들 각각의 수준에 맞는 학습을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영조조(英祖朝) 경연관(經筵官) 이상수(李象秀)의 『경신약법(更辛若法)』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를 가르칠 때 먼저 법을 정하고 구독은 낮고 쉬운 것으로 알 만한 것을 주고 반드시 자신의 능력보다 줄 수를 감하여 학습케 하며, 5행을 감당할 수 있으면 3행에만 그치고 차차 12, 13행을 감당하게 한다.”

 

“어린 아이를 가르칠 때에 먼저 법을 정하고 반드시 정통하게 한 후 에 가르치고, 고식(姑息)하지 말며 해석까지 외우게 하라.”『순승척법 (循繩尺法)』

 

“반드시 스스로 풀게 하되 바삐 풀게 하지 말고 맞지 않으면 고쳐 풀 게 하고, 또 맞지 않으면 고치게 하라. 재삼(再三)하면 통하지 않는 이 없다. 이와 같이 차차 익혀 가면 글 푸는 법례를 알 것이라.”『경신약법(更辛若法)』

 

  이러한 주장에 따를 때 당시의 훈장들은 학도들에게 자율학습과 반복학습을 통한 기초문자 교육 등을 실시하고 있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드러난 사실을 살펴볼 때 훈장은 천자문 등의 기본 소학교재를 통해 학생들에게 문자를 익히게 하였으며, 문자를 익힘에는 쉬운 것에 서부터 어려운 과정으로 나아가는 체계적인 단계가 있었고, 이렇게 익힌 문자는 다시 강독이나 제술, 그리고 습자를 통해 끝없이 반복하여 완벽하게 이해하는 데까지 나가도록 교육하였습니다.

 

 

<천자문>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 기본생활습관의 형성을 통한 인성교육

 

서당(書堂)에는 문자 교육용 교재 이외에 훈석(訓釋)단계의 교재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재들을 읽는 순서는 이이(李珥)의 『학교모범(學校模範)』을 따랐습니다.

 

독서하는 책은 먼저 『소학(小學)』으로써 근본을 다스리고 다음은 『대학(大學)』과 『근사록(近思錄)』으로서 규모를 정하고, 다음은 『논어(論語)』,『중용(中庸)』,『오경(五經)』을 읽으며, 그 사이에 사기(史記)와 선현들의 성리학에 관한 책들로써 뜻을 넓히고 식견을 바르게 한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서당에서는 먼저 동몽을 위한 수신서들을 중심으로 읽고, 이러한 수신서 안에 담겨져 있는 글들을 통해서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성리학 사상과 생활관습을 배우고 익힐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재들 가운데 특히 박세무가 편찬한 『동몽선습(童蒙先習)』은 17세기 숙종조에 이르러서는 그 교육적 가치가 인정되어 국가 공인 교재로 간행되어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삼강오륜에 대한 해설, 유교 원리를 설명한 총설, 역대요의(歷代要義) 등 3부로 구성되어 있어서 윤리를 중심으로 하는 예절교육과 역사의식 등을 익히기에 유익합니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은 고려 충렬왕 때 문신이었던 문헌공추적(秋適)이 지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편저자가 명나라의 범입본(范立本)임이 밝혀졌습니다. 그 내용으로는 인간수련과 가정, 사회, 국가를 다스리는 원칙론과 국가, 사회와 인류의 문화에 기여하여 삶을 풍요롭게 하고 인생의 보람을 올바르게 깨우쳐 주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효경(孝經)』은 공자(孔子)와 그의 제자 증자(曾子)와의 효도에 대한 문답을 추려서 기록해 놓은 것으로 유교가 만행지원(萬行之原)으로 여기는 효(孝)를 강조하고 자녀교육의 기본으로 삼으려했던 교재입니다.『소학(小學)』은 중국 송나라 주자의 제자 유자징(劉子澄)이 편찬한 책으로 수신서입니다.

  이상의 대표적 교재내용을 살펴볼 때 서당에서는 기본적 문자 교육 이외에 유교관상을 바탕으로 윤리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동몽선습(童蒙先習)』에서는 삼강오륜을 중심으로 윤리교육이 이루어지고 있고, 『명심보감(明心寶鑑)』에서는 ‘인간의 선악 구별, 자연과 인 간의 섭리 이해, 자기반성’을 강조하는 형식으로 인간성 함양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효경(孝經)』에서는 효를 인간 도리의 근본으로 하여 유교관상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성교육은 학과교육과 생활지도교육을 통해 구체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세부적으로는 강독(講讀)․제술(製述)․습자(習字)를 통해 숙독(熟讀)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러한 교육과정은 학생들로 하여금 배운 바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고 활용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도록 하였기에, 이러한 학과 공부를 통해 학생들은 자연히 유교윤리를 체득하여 일상생활 에서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교과와 계절의 조화를 통해 학습의 효과를 높이고 계절에 따른 삶의 흥취를 강조하는 형식으로 유교이념과 생활과의 조화로운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서당은 원칙적으로 무학년 무학기제였기에 일과도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훈장의 재량에 따라 학과와 계절을 조화시켜 학습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절(夏節)의 더운 때는 머리 쓰고 연구하는 경문(經文)학과의 강독을 폐하고 흥취를 끄는 시(詩)와 율(律)을 읽고 또 시와 율을 짓는 것으로 일과를 삼고, 춘추(春秋)인 봄과 가을에는 사기나 고문 같은 문장을 읽게 하였으며, 동절(冬節)에는 경서를 읽게 하였던 것입니다. 여가를 잘 이용하여 춘추 야간은 비교적 단야(短夜)이기 때문에 야독(夜讀) 이 없었고, 이 시간을 이용하여 4율을 짓곤 했다고 전해집니다. 주간(晝間)에는 독파후(讀破後) 단편(單片)시간을 이용하여 서도(書道)를 연습합니다. 또 야독(夜讀)을 장려하여 흔히 12시가 넘도록 등하(燈下)에서 쉼 없이 독서를 계속하였습니다. 물론 서당에서 학생들이 밤에 글을 읽을 때는 훈장도 그들과 같이 기거했습니다. 학생들은 의문이 있을 때 스승의 지도를 받았고, 훈장 역시 왕성한 호기심을 가지고 즐겨 질문하는 것을 살아 있는 교육이 라고 여겨 흔쾌히 교육에 임하였습니다.

  다양한 유희(遊戱)를 이용하여 지식 및 인성을 발현하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유희는 서당에서 학동들의 흥미를 유발하여 자연스럽게 자신의 취미 와 인성을 형성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유희로는 고인의 시를 암송시키는 ‘초 (初)․중(中)․종(終)놀이’, 우리나라 8도의 군(郡)이름을 기억시키는 ‘고 을 모듬 놀이’, 이밖에 ‘조조(曹操)잡기’, ‘글 대구(對句)맞추기’ 등이 있었습니다.

  이상에서 서당의 교육정신은 경서를 중심으로 인간의 도리를 함양하게 하는 교육을 실시하되 자연의 순리와 이치에 따르는 것을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훈장의 교육 방침도 인간이 도덕성을 바탕으로 당면한 사회생활을 유지해 가면서 가장 자연스럽게 적응해 나가는 방향에서 학동들의 학습 효율을 높이고자 했음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본 생활 습관교육은 세심한 부분에까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장자(長子)는 관대를 입고 유희하지 말 것과, 장자를 대하여 머리 비듬을 긁지 말며, 이를 쑤시지 말고, 코를 풀지 말며, 귀를 후비지 말 것, 빈객의 노인이 오거든 하당(下堂)하여 영접하고 부호하여 올리고 지팡이를 바치 고 또 부호하여 하당할 것, 남의 의복, 기용(起用), 완호(完戶)의 물건을 부러워하거나 흉보거나 훔치거나 감추거나 하지 말 것, 글씨 쓰고 먹 갈 때 손가락에 묻히고 의복에 떨어뜨리고 책상에 젖게 하지 말 것, 이웃집 과실이나 꽃가지를 꺾지 말며 충(蟲), 조(鳥), 초(草), 목(木)의 일체 생물 에게 심하게 굴지 말 것, 빈가의 어린이는 물론이요, 부귀가의 어린이도 여가에 능력대로 일해야 할 것, 장자 출입 시 반드시 일어나며 가르침이 있거든 공손히 듣고 의문이 있으면 반드시 물을 것 등 무려 60항목이 넘는 교훈이 있어 서당 생활에서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훈장(訓長)은 벌을 통해서도 생도들의 기본 생활습관을 형성하게 하였습니다. 예컨대 아침마다 훈장 면전에서 전일(前日) 학습한 내용을 암통(喑通)하고 불통(不通)이면 훈장은 그 자리에서 바지를 걷게 하여 목(木)으로 생도의 종아리를 때립니다. 이것을 달(撻)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태만하고 훈장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나 다른 사람과 싸운 자, 특히 부형으로부 터 징계를 의뢰 받은 자에게는 수 시간 정좌시키거나 또는 매를 맞았습니다. 물론 초달의 경우에는 대상 학생 자신의 회초리를 해오도록 함으로써 학생에겐 반성의 시간을, 훈장 자신에겐 격양된 감정을 풀 수 있을 만큼 서로 간에 여유가 있었습니다. 초달을 피하고 당번 근무나 실외에 서게 하거나 청소를 시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초달이 인간 형성의 수단으로 여겨져서 입학 시 훈장에게 초달로 사람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통례였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와는 달리 스스로 회초리를 마련해 훈장에게 교육을 당부하던 부모의 마음과, 부모․스승이 신뢰로 형성되어 있던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적 신뢰 속에서 아동들의 인성이 건전하게 형성되어 갈 수 있었습니다.

  이상을 통해서 서당의 훈장은 오늘날 초등 정도의 교육기관에서 유교적 이념을 교육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마을의 도덕적․예양적(禮讓的) 학풍을 수립하고 순화하는 데 공헌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훈장은 밤글 뿐 만 아니라 식사, 잠자는 시간까지 하루 24시간을 학생들과 같이 생활함을 통해서 ‘솔선(率先)’을 실천하였고, 교육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단순히 지식만을 교육한 것이 아니라 생활 태도나 예의 등 생활지도 전반에 걸친 교육을 통해 지식과 인성, 덕성이 함께 가르쳐 질 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 참고문헌: 조선시대 교육기관의 실제와 현대적 시사점 연구(한민석,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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