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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론

조선시대 교육 알아보기: 4부학당(사학)이란?(제도와 성격)

by 신박에듀 2020.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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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에듀몬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관학인 향교의 기능 및 유형, 교육과정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번 시간부터는 관학의 또 다른 유형인 4부학당{이하 사학(四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사학의 배경

 

  조선시대 서울에는 국립 유학 교육기관으로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이 설립되어 있었습니다. 사학(四學) 역시 서당이나 향교와 마찬가지로 고려시대 교육제도를 잇고 있는데, 사학(四學)은 고려시대의 동서학당(東西學堂), 오부학당(五部學堂)에 해당합니다. 사부학당(四部學堂) 설립의 제도적 시점은 고려 제24대 원종 2년(1261) 3월에 동서학당(東西學堂) 설치에서 찾을 수 있으며, 공양왕 2년 2월 기록에 "치경 중오부 급서북면부주유학 교수관(置京中五部 及西北面府州儒學敎授官)"이라는 데서 보이듯 고려시대의 오부 학당 제도를 이어서 조선왕조에서도 서울을 동․서․중․남의 오부로 나누고 여기에 각각 오늘날 중등 정도의 학교를 하나씩 설치하여 오부학당(五部學堂)이라 하였습니다.

  오부학당(五部學堂)은 태종 11년까지 독립된 학사를 가지지 못하고 고려의 체제를 답습하여 불사(佛寺)를 이용하는 형태로 교육하고 있었습니다. 태종 5년에 한양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고, 국가의 지도이념인 유학 교육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국가적으로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남부 학당의 건물이 태종 11년에 완성되었고, 세종 원년 7월에 학당 동․서재를 넓게 조성하였으며, 동왕 4년 12월에는 중부학당이 조성되었습니다. 한편 북부 학당은 세종조 및 성종 초에 일부 관료의 설치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지만 그것이 필요치 않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끝내 설치되지 못헀습니다. 마침내 성종 때 편찬 반포된 조선왕조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중학(中學)․동학(東學)․남학(南學)․서학(西學)의 사학(四學)이 종 6품의 아문(衙門)으로 법제화됨으로써 한성부에는 사학(四學)만이 있게 되었습니다.

 

<오륜행실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2. 사학의 입학자격

 

  사학(四學)은 성균관에 입학하기 위해 필요한 중등 정도의 유학교육을 담당하는 관학(官學)이었습니다. 사학(四學)의 입학 자격에 대해서 성균관처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명백히 규정된 것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학(四學)의 현실적 목적이 성균관 진학 및 과거 응시에 있었기 때문에 성균관의 입학자격에 따라 사학(四學)의 입학 자격을 결정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구체적으로 학당의 입학자격은 태종 13년 6월 대사성(大司成) 권우(權遇)등이 올린 권학절목(勸學節目)에 기재된 대로입니다.

 

예로부터 사람나이 8세에 이르면 왕공(王公) 이하로부터 서민 자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학의 법에 들어가는 것에 의하여 일품 이하로부터 서인 자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당에 입학하여 『소학(小學)』에서 시작하였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양반자제와 서민에게 모두 사학(四學)의 입학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선초의 정치․경제․사회적인 여건들을 보았을 때 서민보다는 양반의 교육적 환경이 유리했으므로 생도의 구성 비율 면에서 양반의 자제가 매우 많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학당의 취학연령은 태종 11년 11월 송(宋)의 외학제(外學制)를 토대로 오부 학당의 학제가 마련되면서 10세 이상 된 아동에게 입학을 허가하고 있지만 불과 2년 후 동왕 13년 속육전(續六典)이 제정되면서 8세가 되면 학당의 입학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학(四學)에서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연령이 15세이기 때문에 15세 전후의 연령층이 가장 많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심지어 성균관에 승보(升補) 하지 못한 양반 자제들 중에는 20세 이상의 생도들도 있는 것으로 보아 연령에 대해서는 별다른 제약을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학당은 서울 오부(五部)의 행정구역을 토대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대체로 자기가 속한 부(部)에 설치된 학당에 입학하였지만, 때로는 서울이 아닌 지방의 아동들이 입학하기도 하였습니다.

  사학(四學)의 정원은 각 100명씩 400명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원은 세종 4년에 중부학당에 100명, 세종 6년에 동․서부 학당에 각각 100명씩 한 것을 그대로 법제화하였습니다. 한편, 성종 이전부터 입학대상자들이 입학하지 않아서 각 학당마다 80명만 양성하도록 하였고, 성종 이후 연산군대의 교육 피폐로 말미암아 중종대에 들어와서는 유생수를 각 학당마다 50명으로 줄였습니다. 명종대에 와서는 정원을 60명으로 하다가 선조 15년의 「학교 사목(學校事目)」에서는 사학(四學)의 정원을 200명으로 하고 다섯 패로 나누어서 한 번에 20명씩 학교에 거처하게 하고, 10일을 기한으로 윤번제로 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3. 사학의 교원

 

  사학(四學)의 임원 구성은 교수(敎授)2명과 훈도(訓導) 2명으로 조직되었습니다. 사학(四學)의 교관은 경서에 능통하고 덕망과 인품을 겸비한 유학자 중에 선발하였으며, 초기에는 성균관의 교관 중에서 파견되어 사학(四學) 교관의 직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교육의 실질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교관의 겸임제를 폐지하고 전임제를 실시하였습니다. 즉, 세조 9년에 이조가 “전에 전임으로 하였던 것을 성균관 겸임으로 한 뒤로 가르치는 것이 전일하지 못하고 학교가 날마다 폐하여지니 사학(四學) 교관(敎官) 2명씩을 서반직(西班職)으로 하여 가르치는 일을 전임(專任)시키자”라고 상소한 데서부터 실시되었던 것입니다.

  이상을 통해서 사학(四學)은 중앙에 있는 중등교육기관으로서 국가의 지도를 받는 관인의 교육기관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사학(四學)의 교관은 모두 관인이었으며 성균관 교관이 겸직하기도 하였고, 후에 전임 교관이 임명되었습니다. 사학(四學)의 학생은 성균관처럼 일정한 자격을 지니고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15세를 전후한 연령의 학생이면서 서민과 양반의 자제가 모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 참고문헌: 조선시대 교육기관의 실제와 현대적 시사점 연구(한민석,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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