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에듀몬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집단 무의식으로 대표되는 융의 분석 심리학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융의 자아의식의 세부 개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융은 ‘자아’가 처음부터 형성되어 있지 않으며, ‘의식’의 파편들을 모아서 비로소 형성되는 영역이라고 했습니다. 한 개인의 인격은 자아의식의 등장으로 시작되며, 자아의식의 등장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본능에서 벗어나 점차 본능과 대립을 하게 된다. 본능과의 대립이 의식을 만든다고 보고 있습니다. 자아의식의 형성은 비로소 인간을 인간답게 하며 문화를 가진 인간으로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자아가 의식을 갖는 것은 본능과의 대립적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위험을 자청한 것처럼 되어 버립니다. 자아가 정신의 일부로서 따로 떨어져 나오면서 근원적 정신상태에서 가졌던 본능의 안전장치에 서 벗어나 유약하고도 불확실한 영역이 됩니다. 그럼에도 자아의식은 그만큼 자유와 가능성에 놓이는 것입니다. 자아의식의 형성은 바로 홀로 세상에 서는 것으로 의식을 갖고 오로지 자신의 담력을 바탕으로 결정과 해결을 해야만 모든 무의식적 유아성이나 본성적인 것과의 결별이 이루어집니다.
1. 자아의식의 형성 및 분화
위에서 간략히 설명한 것처럼 자아는 의식을 획득하면서 자신과 타자를 인식할 수 있는 주체가 됩니다. 그러나
자아가 최초에 획득한 의식성으로 외부 대상을 아직 인식할 정도가 아니며, 심지어 앞서 경험했던 것들도 제대로 연결하여 보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아는 겨우 자신의 존재를 떠올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이는 아이가 자신을 제삼자로 부르는 현상으로 드러납니다. 아동은 시종일관 우선 삼인칭 혼잣말을 합니다. 나중에 자아 계열 혹은 자아 콤플렉스가 분열을 통해서 자신의 에너지를 얻게 될 때 비로소 주체 또는 자아 존재의 느낌이 생겨납니다. 그것은 아이가 일인칭으로 스스로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일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기억의 연속성이 시작됩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근본적으로 자아 기억의 연속입니다. 자아가 경험된 사실에 대한 연속적인 기억을 가지게 되는 것은 나라고 하는 일인칭적 주체감이 획득되어야 가능하게 될 때입니다. 말하자면 의식을 획득한 자아가 근원적인 상태에 서 따로 떨어져 나와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으로 작용할 충분한 힘을 갖추었을 때 가능하게 됩니다. 이런 자아의 고유영역을 자아 콤플렉스라고 부릅니다. 자아 콤플렉스는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나 인격의 표면에 드러나며, 이로 인하여 다른 콤플렉스와 달리 유일하게 전체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분화를 이룩하게 됩니다.
아이는 3~4세에 이르러서야 겨우 ‘나’라는 주체로써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나’라는 주체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아동기의 자아의식은 아직 활동의 완전한 주체가 되지 않습니다. 겨우 ‘나’라는 주체의 영역이 드러날 뿐입니다. 자아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단무의식이 제공하는 환경 속에 머물렀습니다. ‘나’라는 주체감이 형성되면서 근원적 집단 무의식은 자연히 상대적인 태도를 갖게 됩니다. 이는 주로 부모의 특징으로 은유됩니다. 자아는 그곳에서 형성되었으므로 마치 자식과 같이 됩니다. 집단 무의식이 부모라고 하는 것은 여전히 ‘자아’를 감싸고, 보호하고 에너지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주체가 생겼으나, 제대로 분화하여 분리가 되지 않는 한에서는 부모의 심적 환경 속에 머무르고 있으며, 사춘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라는 개체로서의 특징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사춘기에는 성적 욕구가 생겨나는 등 신체적으로 성숙하게 되지만, 동시에 정신적 탄생도 있게 됩니다. 이때의 정신적 탄생은 부모가 된 ‘집단 무의식’의 영향력으로부터 구별되는 영역으로 독립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춘기는 “생리적 혁명의 시기이자 동시에 정신적 혁명”의 시기인 셈입니다. 사춘기에 일어나는 정신적 혁명은 6~7세부터 서서히 시작된 것입니다. 6~7세의 아동은 유치원, 학교 등에 가게 되는데, 이 시기에 내재한 부모상을 외부에 투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습니다. 이로써 아동은 실재의 부모상과 내면의 부모상을 분리할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흔히 ‘미운 일곱 살’의 시기는 바로 부모상으로부터의 분리라는 문제가 드러나는 시기이므로 아이는 ‘아니’라는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아동은 자발적으로 생겨나는 자유의지의 느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게 되는데, 이것으로 부모와 갈등을 겪어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6~7세 때에 일어나는 부모상과의 분리는 결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근원적 무의식에 대립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아동의 상태는 본능에 대결하는 것이지만, 이것 자체가 본질적으로는 본능에 따르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외부의 제약이 주관적 본능적 충동을 방해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억제나 제약은 스스로를 분열시킬 정도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때의 아동은 충동에 굴복하거나 아니면 다른 외적 요구에 완전히 일치하게 되면서 가능한 분열을 피해 가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춘기에 이르면 외부의 간섭이나 제약이 본능적 충동을 억압하기 시작하고 하나의 충동이 다른 충동에 대해 대항하는 형태가 되면서 정신의 내부는 서서히 복잡한 갈등의 구조로 변해갑니다. 한 충동이 다른 충동에 대해 서로 대립적이 되면서 마침내는 자아 자체가 2중 적 구조를 형성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춘기의 정신적 혁명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설명하면 자아의’이 의지력을 갖고 주도하게 되면서, 서서히 본능적 충동들을 억제하거나 수정하려 함으로써, 마침내는 본능은 대립하는 힘으로 작용하게 되어 버립니다. 이로 인하여 본능적 충동들은 강한 정동성의 콤플렉스로서 작용을 하게 됩니다. 사춘기에 이르면 자아는 집단 무의식의 본능적 충동에 동화하지 않고 오히려 대립하면서 일방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2. 페르소나(persona)
우리는 성인이 되면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주어진 어떤 역할을 맡게 되면서 점차 그 역할을 ‘나’라고 믿으면서 살게 됩니다. 바로 그 ‘나’는 탄생 후 ‘의식’을 획득하고 본능에 힘입어 분화를 거듭한 자아와 달리 이제는 전혀 본능에 따르지 않고 사회적 역할을 위하여 형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기에 이르렀을 때 자신도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보여지는 인격으로서의 ‘나(페르소나)’와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준 적이 없는 ‘나(그림자)’가 함께하게 됩니다. 융은 이 제2의 자아를 페르소나라 불렀다. 그것은 자아의 바깥 인격, 즉 가면으로서 사회적인 역할을 할 때 개인성을 가장하여 드러나게 되는 것인데, 이것도 하나의 콤플렉스입니다. 그러나 자아 자체의 이중적 분열은 자아의식의 발달상에 있게 되는 어쩔 수 없는 것이며, 정상적인 것입니다. 페르소나는 집단 무의식의 한 부분으로 자아의식이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을 때 필요로 하는 여러 기능의 복합체입니다. 페르소나는 현실에 적응해서 사는데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해롭게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개인이 외부에서 기대하는 역할에 너무 몰입하여 본래 자신의 본성을 잃고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에 지나치게 자아를 동일시하게 되면 진정한 자기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자신을 잃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페르소나가 너무 팽창하게 되어 진정한 자기를 무시하게 되면, 심리적 공허함과 허무감에 빠지거나 극단적으로 가짜 자기를 자아로 동일시하게 됩니다.
3. 그림자(shadow)
그림자란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을 말합니다. 그림자는 자아에 알려져 있지않는 부정적인 자기상의 속성입니다. 나의 모습으로 또는 나의 것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부끄러워하고 회피하고 숨기고 싶어 하는 인격입니다. 의식될 기회를 잃어버려서 미분화된 채로 무의식 영역에 남아 있는 원시적 심리상태라고도 합니다. 무의식에 있는 그림자는 일반적으로 투사를 통해 경험되거나 꿈이나 환상 속에서 인격화되어 나타납니다. 투사란 우리가 의식으로부터 밀어내어서 아직 의식화시키지 않은 것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출세욕, 성공, 성욕 등을 제대로 자신의 욕망으로 이해하지 않고 그런 욕망을 타인에게 투사하여 타인을 과도하게 비난하거나 칭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림자를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는 지킬박사와 하이드, 또는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관계입니다. 이들은 같은 사람의 두 얼굴인데, 서로 반대편을 향하고 있어 상대편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같은 사람의 양면을 대변하는 인물입니다. 이들을 타인으로 거부하거나 외면할 것이 아니라 그림자가 수용되고 동화된다면 그림자는 자발성, 통찰력, 창의성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림자가 계속해서 완전히 억압당하게 되면 그 사람은 본능적인 지배인 자기로부터 차단당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림자와 대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자아는 그림자에 압도당하지 않고 그림자의 힘을 조절하여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균등하게 표현될 수 있으며 그럴 때 사람은 삶의 건강한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아니마(anima)/ 아니무스(animus)
페르소나가 사회적 적응을 하기 위해 작동했던 외적 인격이라면 아니마, 아니무스는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하는 내적인 인격입니다. 자아의식이 외부환경의 적응을 위해 제2의 자아인 페르소나와 전적으로 동일시를 하게 되면, 내부 환경에도 적응을 요구하는 무의식의 작용이 있게 됩니다. 바로 아니마 혹은 아니무스가 페르소나에 보상적으로 작용하는 내면의 인격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자아는 자신의 일방적 태도를 개선하고 전적으로 집단 무의식의 조절력을 신뢰하고 맡김으로써 기꺼이 무의식과 함께하는 통합적 인격을 형성하기에 이릅니다.
융은 모든 인간은 생물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 양성적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남자는 내부에 여성적 요소가 있고 이를 아니마라고 합니다. 모든 여성의 내부에 있는 남성적 요소는 아니무스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한쪽 성이 우세하면 나머지 성은 열등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성의 무의식에는 여성성의 정신 원리가 열등한 상태로 존재하고 여성의 무의식에는 남성성의 정신이 존재합니다. 남성성의 속성은 이성(logos)이고, 여성성의 속성은 사랑(eros)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양성성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에 이성과 사랑을 겸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숙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 남자는 내부에 잠재해 있는 여성성, 즉 사랑을 이해하고 개발해야 하며, 여자는 내부에 있는 남성성, 즉 이성을 이해하고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마, 아니무스는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하는 내적인 인격으로 제2의 자아, 페르소나를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즉, 생물학적 성을 뛰어넘어 자신의 팽창된 남성 또는 여성 페르소나를 조절하는데 자신의 잠재한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 인격이 보상적 작용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페르소나의 일방적 독주를 조절할 자기 내면의 무의식,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성숙한 자기(self)로 나아가게 하는 안내자인 것입니다.
5. 자기(self)
융은 자기를 정신의 중심에 위치해 있는 원형이며 의식과 무의식 전체의 중심이 되며, 의식과 무의식 과정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했습니다. 자기는 개인무의식의 차원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또는 객관 정신의 차원을 포함합니다. 자기는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며 우리 자신으로부터 온 것도 아닌 그 자체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전적으로 의식적이지도 전적으로 무의식적이지도 않은 모든 것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중심점 또는 중심축입니다. 그것은 정신 전체를 위한 생명의 원천입니다. 자기는 더 큰 더 권위 있는 존재로서 자아와 관계를 맺습니다. 자아가 자기의 접근에 대해 협조적으로 반응하면 우리는 모든 존재의 중심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융은 정신적인 영역을 초월하는 것을 자기라고 하였습니다. 융은 프로이트와 결별하고 힘들어 했던 시기에 자기를 경험했습니다. 2년 동안 융은 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정신이 분열되는 것을 막아주고 정신을 초월하여 그 너머까지 도달하는 경험을 하였고 그러한 경험을 가능케 한 것을 자기라고 불렀습니다. 자기를 인식하고 실현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오랜 기간의 인내와 훈련이 필요합니다. 온전한 자기 인식은 인간이 이루어야 할 최종 목표이고, 사람들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게 하는 삶의 동기로서 작용합니다. 만일 우리가 자기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으려고 계속해서 무의식 상태에만 머물고 자기가 보내는 메시지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전인적 인격 발달을 이룰 수 없게 됩니다.
※ 참고문헌: 노안영, 강영신(2018). 성격심리학. 학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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