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에듀몬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관학인 향교의 제도와 성격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향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과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향교의 교육과정
1) 지방민 교육기능
조선은 건국 초부터 「농상(農桑)」과 함께 「풍화지원(風化之源)」으로서의 학교교육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었습니다. 불교를 대신하여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하고 있는 조선왕조로서는 억불숭유 사상(抑佛崇儒思想)을 확산시킬 수 있는 관학 교육기관을 어느 때보다도 강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태조는 그의 원년에 내린 교지(敎旨)에서 다음과 같이 관학 교육의 필요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문무 두 과거는 한 가지만 취하고 한 가지는 버릴 수 없으니, 중앙에 는 국학과 지방에는 향교에 생도를 더 두고 강학을 힘쓰게 하여 인재를 양육하게 할 것이다. 그 과거의 법은 본디 나라를 위하여 인재를 뽑았던 것인데...
이상에서 태조는 관학(官學)교육을 통하여 문무 양과의 인재를 양성하고, 동시에 사상적으로 유학 중심의 국가를 안정시키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앙에서는 성균관(成均館)이 그 역할을 담당하고, 지방에서는 향교(鄕校)가 담당하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세조 7년에는 세조가 도승지(都承旨)홍응(洪應)과 대담하는 과정에서 향교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학교의 법을 넓힘에는 향교가 그 주가 되어....
이는 중앙에 성균관과 지방에 향교를 두어 인재를 양성하고 과거를 통하여 국가에 필요한 관료를 확보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인재를 양성하여 국가에 필요한 관료를 확보하려 한 것은 향교보다는 성균관에 기대한 것으로 판단되며, 향교는 그것보다는 화민성속(化民成俗)의 기능에 비중을 더 두었다고 하겠습니다. 교육기관으로는 중앙에는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이 있었고, 지방에는 향교(鄕校)가 있었습니다.
향교의 교육적 기능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세조 7년, 세조의 통치시절에 관학에서 유학 교육을 철저히 받은 자에게 문과의 관문을 통과시켜, 유교의 교양을 지닌 관료를 확보하려 한 것입니다. 또한, 비록 과거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자라 하여도 정부가 지향하는 신사회질서의 확립에 이바지하는 효과도 있었습니다. 태조는 그의 원년에 내린 교지(敎旨)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문무 두 과거는 한 가지만 취하고 한 가지는 버릴 수 없으니, 중앙에 는 국학과 지방에는 향교에 생도를 더 두고 강학을 힘쓰게 하여 인재를 양육하게 할 것이다. 그 과거의 법은 본디 나라를 위하여 인재를 뽑았던 것인데...
향교는 성균관과는 달리 전국의 각 지방에 산재하여 있었기 때문에 지역적으로 서민문화의 기반에 깊이 접촉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고려시대 이래 서민 문화의 심층에 위치한 불교문화를 유교문화로 대치하는 데 있어 당시로서는 향교 이상 좋은 수단이 없었습니다. 한편 태종 때에 사간원의 시무사 상소에서는 풍속이 국가의 원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풍속은 국가의 원기이고, 교화는 국가의 급선무이며, 교화가 다스려지면 풍속이 후해지고 국가가 잘 다스려지고... 이것을 볼 때 정치의 오르고 내림은 풍속의 후함과 박함에 관계된다…
바람직한 풍속의 형성은 말할 필요도 없이 유학의 이념에 입각한 가치관의 형성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자연히 조선의 교육이 예와 덕을 중요시하게 하였던 것이며, 그것들의 확신인 화민성속(化民成俗)에 최우선의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전국의 각 군(郡)․현(縣)에 설치되어 있던 향교가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향교교육의 성패는 지방 행정관의 진퇴를 가름하는 정책 과업이 되었습니다. 즉, 지방수령은 「수령칠사(守令七事)」의 하나로서 향교 교육의 진흥을 책임 감독하는 「수명학교(修明學校)」의 직책을 부여받았는데, 이 수명 학교의 역할 여부에 따라 그의 진퇴가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러한 사실은 고려시대에는 수명 학교가 「수령오사(守令五事)」에 들어 있지 않았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조선왕조가 향교에 걸었던 기대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조선의 향교는, 예컨대 명나라의 향교가 행정관료의 확보를 최우선의 교육적 기능으로 하고, 백성교화는 이차적인 기능으로 삼았던 것과는 달리, 조선의 향교는 백성 교화를 일차적으로 담당하였고, 관료 자원의 확보는 이차적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중앙에서 직접 수령과 감독관을 파견하여 이들에게 향교의 설립과 교육의 진흥을 책임지게 했던 것입니다. 향교가 학교 제도상으로 중앙의 성균관에 직결되는 하급 단계의 교육기관이 아니고 완전히 독립된 별개의 교육 기관이었던 점으로도 관료 양성의 목적보다는 화민성속(化民成俗)에 그 설치의 의의를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국의 300여 군(郡)․현(縣)에 일시에 향교를 건립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리하여 향교가 새로이 건립되기 이전에는 대개 불사(佛舍)나 정사 (精舍)를 강학소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것은 강학소로 사용할 적당한 장소가 없었던 데 원인이 있었겠지만, 종래의 불교 강학소를 유교 강학소로 전환함으로써 억불숭유정책의 일단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도 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향교의 교육적 기능은 지방민 교육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중기이후로는 교화의 기능이 더욱 강화되어갔습니다. 향교는 서원이나 성균관이 관리등용에 치중하던 것과는 달리 시종 유교 문화를 널리 알리고 실천하는 데 그 교육적 소임을 다하고자 하였습니다.
2) 개인차에 따른 능력별 교육
향교에는 일정한 입학기간이나 특별한 재학 연한이 없으며, 연령에 따른 구별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학습 진도는 단지 개개 교생의 능력에 따른 것이었으며, 자신의 능력에 따라 학습 진도에 차이가 났습니다. 따라서 이들을 효과적으로 교육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개별학습 방법을 택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습니다.
향교의 교관은 주로 ‘강(講)’을 통해서 교육하였습니다. 향교생의 입장에서 ‘강(講)’은 처음 경서를 접할 때는 그 의미하는 바에 대해 먼저 교관으로부터 강의를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학습한 후 스스로 큰 소리로 읽고 교관과의 일대일 문답을 통해 이해정도를 평가받습니다. 이러한 ‘강(講)’ 의 방법은 교생들이 자신의 교육 정도를 교관으로부터 평가받음과 동시에 스스로 가늠해볼 수 있어 자율학습에 효율적이었습니다. 또한 교관의 입장에서 볼 때 교생들 하나하나의 체득 정도를 알아보고 수준을 파악할 수 있어 교수 활동과 학습자 파악에 용이한 교육 방법이었습니다. 교관과 교생 간의 상호 이해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학습 정도를 보아가면서 선행학습에 통달해야만 다음 단계의 학습으로 진행하였습니다. 또한 한꺼번에 많이 배우기를 힘쓰지 않고 연정(硏精)에 힘쓰는 단계적이며 점진적인 교육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향교의 교육 평가방법에는 출석평가와 학력평가가 있습니다. 출석은 교생의 근타(勤惰) 성적을 점수로 평정하는 원점법(圓點法)으로 평가되었습니다. 학력 평가에는 일강(日講)과 월례제술(月例製述)이 있었습니다. 일강(日講)은 매일 교관이 학생이 읽은 책을 지명, 강독케 하여 통과한 자는 그 점수를 과거 식년의 강서(講書) 점수에 합하고 통과하지 못한 자는 벌하는 것을 말합니다. 월례제술(月例製述)은 초순에는 의(疑)․의(義)나 논(論)을, 중순에는 부(賦)․표(表)나 송(頌)․명(銘)․잠(箴)을, 그리고 종순에는 대책(對策)이 나 기(記)를 제술로써 과제함을 말합니다. 제술 체제는 간결하고 엄숙하며 세밀함과 단절이 있도록 하였고 해서(楷書)에 힘쓰게 하였습니다. 평가의 등급은 구독의논(句讀議論)과 해석, 강령의 개괄, 응용의 능력 등의 정도에 따라 대통(大通)․통(通)․약통(略通)․조통(粗通)․불통(不通)의 5단계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평가 방법 역시 단계적인 학습을 추구하게 했던 교관의 교육방법이며, 교생의 성실성을 교육하면서 지식적으로도 향상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개인의 인격과 능력이 향상되고, 단순한 이해가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의 응용에까지 이르게 하는 교육이 실시되었던 것입니다.
향교에서는 생활지도와 인성지도의 일환으로 엄격한 훈육의 방법을 택해서 교생의 일상생활 전반에까지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즉, 향교에 서는 교생이 지켜야 할 행동 준칙을 세워 만일 이것을 어기게 되면 그에 따른 벌을 받도록 하여 엄격하게 교육시키고 있었습니다. 성현(聖賢)을 논(論) 하기를 싫어하는 자, 고담이론(高談異論)을 좋아하는 자, 전대현인(前代賢 人)을 이단하는 자, 조정(朝政)을 비방하는 자, 재물과 뇌물을 상론(商論)하는 자, 주색(酒色)을 논하는 자와 시속(時俗)에 빠지는 자를 벌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오륜을 어기는 자, 재주를 믿고 노력하지 않으며 스스로 귀한 체 하는 자, 부를 믿고 스스로 자랑하고 어른을 능멸하는 자, 남에게 아첨하는 자는 향교에서 내쫓기도 하였습니다.
교관의 입장에서 지도하고 훈련하는 교육이 이루어졌다면, 교생들끼리 는 서로를 엄격히 단속하면서 근신하는 습관이 형성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을 요약할 때 향교 교관의 역할은 다음 세 가지로 추론할 수 있다.
첫째 교관은 강(講)을 통해 교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점검하면서 그들의 개성이나 지식의 성장을 꾀할 수 있는 교육을 실시하였다는 것입니다. 강(講)을 통한 면대면 교육방식은 이러한 교육적 특성을 가능케 하였습니다.
둘째로 출석평가와 학력평가 방식을 통해 교생들의 성실성과 개인의 지적 능력을 단순한 암기나 이해의 수준으로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 응용할 수 있게 교육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출석 평가는 날마다 이루어지는 것이고 학력평가도 일별이나 월별로 이루어져서 직접 교생들의 성적이나 능력 변화를 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향교의 교관들은 엄격한 훈육지도와 생활 관리를 통해 지식으로서의 앎 이전에 인격적인 앎을 알아 가도록 교육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훈육의 내용이나 생활 관리의 사항들이 모두 교관 자신이 먼저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교관이 먼저 솔선했다는 사실에서 보면 교관의 생활 자체가 교생들의 인격도야는 물론 해당 지방의 백성들에게도 교화의 효과를 적지 않게 지녔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 참고문헌: 조선시대 교육기관의 실제와 현대적 시사점 연구(한민석,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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