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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론

조선시대 교육 알아보기: 향교란?(제도와 성격)

by 신박에듀 2020.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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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에듀몬입니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많은 기관과 교육내용들이 집대성되었습니다. 조선시대의 교육은 크게 관학과 사학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번 시간에는 관학의 대표적인 기관인 향교의 기능과 성격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향교 제도

 

향교(鄕校)는 교육 내용의 난이도를 기준으로 할 때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성균관보다는 조금 낮은 오늘날 중등 수준 단계의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설립 및 운영의 측면에서 보면 향교는 공교육 기관이었고, 제도상으로는 국가적 교육제도를 시행하며 정부의 지시와 감독을 받도록 법에 규정된 교육기관이었습니다. 교육행정체계의 측면에서는 예조에 소속되어 있는 기관이었으나, 일차적 책임은 지방수령이 지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향교의 교육을 직접 담당하는 교관요원은 전원이 관인이었습니다.

 

 1) 교원 조직

 

  교원 조직에는 교수관(敎授官), 훈도관(訓導官), 제독관(提督官), 교도관 (敎導官), 교양관(敎養官), 학장(學長)등이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서 교수관과 훈도관, 제독관, 교도관, 교양관은 중앙에서 파견한 관인 교관이었고, 학장(學長)은 지방 행정책임자가 임명하는 비관인 교관이었습니다. 이 가운데서도 교수관, 훈도관, 교도관 등이 실질적으로 향교에 상주하면서 교생들의 교육을 담당하였습니다. 교관의 자격으로는 조선 초기의 단지 통경노성지사(通經老成之士)라는 규정만이 있었으나, 태종 16년(1416)에 자격요건에 따라 교관의 명칭이 세분되면서 교수(敎授)는 문과 출신으로 6품 이상을, 훈도(訓導)는 참외(參外)를, 교도(敎導)는 생원(生員), 진사(進士) 출신으로 제한되었습니다. 학장(學長)은 만 40세 이상의 생원이나 생도 중에서 학술이 정명하고 사범이 있는 자로 규정하여 초기의 통경노성지사(通經老成之 士)를 계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교관 정책은 국가 정책에 따라 많은 변화를 수반하면서 때를 거듭할수록 교관의 자격 요건이 점차 완화되어 가다가 성종 대에 이르면 교도와 학장의 직이 사라지고 교수와 훈도만 남게 됩니다.

 

 2) 교생

 

  향교의 교생은 평균 16세 전후였으며, 학력에 대한 제한도 그다지 까다롭지 않았습니다. 신분에 대한 제한도 명시되어 있지 않았구요. 향교의 학생수는 부(府)와 대도호부(大都護府)와 목(牧)에 90명, 도호부(都護府)에 70명, 군 (郡)에 50명, 현(縣)에 30명의 학생을 두고 16세 이하는 이 한(限)에 들지 않도록 하였는데, 이 기준은 끝까지 계속되었습니다.

 

 3) 교관

 

  향교의 교관은 유교 윤리를 지도하고 엄격한 규율 아래 생활지도를 맡았습니다. 교관의 역할 중 다른 교육기관과 구분되는 점은 향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뿐 아니라 그 지방의 백성들을 교화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향교의 교관은 시기에 따라 명칭이나 그 자격 요건에 많은 변화를 겪었으나 교생에게 유교 윤리를 지도하고 엄격한 생활지도를 담당했으며, 지방민 전체의 스승으로서의 역할은 시대를 관통하여 한결같았습니다.

 

 

출처: 두산백과

 

 

2. 향교의 교과

 

  한편 향교에서 가르친 교과로는 때에 따라 비중의 차이를 달리하기는 하였어도『소학(小學)』, 사서(四書), 삼경(三經) 또는 오경(五經), 성리대전(性理大全),『삼강행실(三綱行實)』,『이륜행실(二倫行實)』,『효경(孝 經)』,『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통감(通鑑)』,『송원범요 (宋元範要)』 등의 제사(諸史), 중국(中國) 선유(先儒)의 제설(諸說),『향 약(鄕約)』,『가례(家禮)』 등이 중심이 되어 있었습니다.

 

<향교의 교과>

기본교과

소학(小學)․호경(孝經)․문공가례(文公家禮)

필수교과

사서오경(四書五經)

기타교과

역사 (歷史)

통감류(通鑑類)[통감훈의(通鑑訓義)․통감강목(通鑑綱目)․소미통감 (少微通鑑)․통감절요(通鑑節要)]․사기(史記)․송원절요(宋元節要)

제술 (製述)

유문(柳文)․한문(韓文)․초사(楚辭)․문선(文選)․책문(策文)․고부 (古賦)․고시(古詩)

경전 (經典)

성리대전(性理大典)․근사록(近思錄)․춘추좌전(春秋左傳)

교화 (敎化)

삼강행실(三綱行實),고문진보(古文眞寶)

※ 출처: 조선시대 교육기관의 실제와 현대적 시사점 연구(한민석, 2011)

 

  이 가운데서 조선 초기로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중요시한 것은 『소학 (小學)』이었습니다. 권근(權近)은 태종 7년에 『소학(小學)』의 중요성을 을 가장 중요한 교과라고 하였던 점으로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소학(小學)』의 글은 인륜․세도에 매우 긴절한 것이 온데, 지금의 학자는 모두 익히지 않으니 심히 옳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경중(京中)과 외방(外方)의 교수관이 모름지기 생도들로 하여금 먼저 이 글을 강 한 연후에 다른 글을 배우도록 허락하게 하고 생원시에 응시하여 태 학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성균정록소(成均正錄所)로 하여금 먼저 이 글의 통부를 상고하게 하여 응시하도록 허락하고 길이 항식(恒式)을 삼으소서.

 

  또한 세종 21년에는 성균관주부(成均館注簿)송을개(宋乙開)가 상주(上奏)를 통하여 『소학(小學)』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각 관의 학교로 하여금 밝게 학령을 세우기를 청하였다 명하여 예조에 내려 성균관(成均館)과 더불어 의논하게 하니, 성균관에서 의논하기를… 성균관, 사학(四學)으로부터 향교(鄕校)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학(小學)』으로 학령을 삼으소서.

 

  이상에서 『소학(小學)』은 인륜 세도에 지극히 필요한 교재로 인정되었다는 것과 관학의 학령으로 삼았을 정도의 필수적인 교재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학(小學)』의 내용은 입교(立敎), 명륜(眀倫), 경신(敬身)을 대강으로 하여 구성된 아동용 교육서로서, 그 교육적 가치는 주자의 『소학서제 (小學書齋)』에 드러나 있습니다.

 

“옛날 소학에서 사람을 가르칠 때에 물 뿌리고, 쓸며(청소), 응하고, 대답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예절과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면 스승을 높이고 벗을 친히 하는 방도로써 하였는데, 이는 모두 몸을 닦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히 하는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소학(小學)』은 사람이 특히 어려서부터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에 서부터 시작해서 성인이 되어 자기 자신은 물론 천하를 다스리게 되기까지의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의 대강은 가르침을 세우고, 인륜을 밝히며, 몸의 행실을 경건하게 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소학(小學)』 다음으로 향교(鄕校)에서 중요시한 교과는 『효경(孝經)』과 사서오경(四書五經)이었습니다. 세종 11년에 허조(許稠)는 「『소학(小 學)』은 과거의 상식 과목이 되어 모두 학습하게 되었는데,『효경(孝經)』 은 초학자로서 필독서인데도 불구하고 읽지 아니하는 폐가 있다」고 하여, 경연에서 사용하던 구해효경(句解孝經)을 저본으로 하여 250부를 인간반행(印刊頒行)하도록 한 데서 『효경(孝經)』을 중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외방 향교의 교도들이 교생을 지도할 때 차질(蹉跌)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태종 때에 권근(權近)이 삼경(三經)에 토를 달았고, 세종 때에 변계량(卞季良)이 사서(四書)와 예기(禮記)에 각기 토를 달아 반급(頒給)하였습니다. 세종 17년에는 예조에서 각 도 감사에게 다음과 같이 전달하였습니다.

 

성리대전과 사서오경을 조선의 유학자들은 마땅히 명을 잇고 그것을 찬술 하며, 앞선 유학자의 말을 캐고 모아 그 속뜻을 밝히고, 실로 성리의 연원을 학자는 마땅히 먼저 강구하여야 한다.

 

  이러한 사정에 비추어 볼 때 향교의 교관은 우선 『소학(小學)』을 교육하여 향원들로 하여금 생활의 기본예절을 익히게 하고, 그다음으로 『효 경(孝經)』을 가르쳐서 효의 실천을 보다 깊게 하였으며, 사서오경과 성리 대전 등 성리학의 핵심사상을 담고 있는 교재들을 가르쳐 유학적 사유를 지닌 인간이 되도록 하였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한편 구체적인 실천행동의 실현으로는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삼강행실(三綱行實)』과 같은 교재를 통해서 가르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떠서 선조 6년부터 『여씨향약(呂氏 鄕約)』이 향교의 교과로 채택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향교가 당시 지방 민들의 교화라는 책임을 다하는데 유익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즉, 연산군 때에 이르러 사회적으로 문화가 정체되고 붕당과 정치적 알력(軋轢)이 생겨나기 시작해서, 그 후에 계속된 사화(士禍)로 인하여 조야(朝野)가 혼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를 개혁하고자 이황과 이이를 중심으로 『여씨향약(呂氏鄕約)』의 실시를 주장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향약에는 본래의 여씨향약과는 달리 조선사회에 고유한 풍속과 민정에 알맞은 내용으로 보완되어 수록되었습니다. 정부는 전국 향교로 하여금 『여씨향약(呂氏鄕 約)』을 교과로 책정케 했습니다.

  향교가 『소학(小學)』을 기본으로 하고 『효경(孝經)』과 사서오경(四 書五經), 그리고 향약(鄕約)을 주요 교과과정으로 삼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향교의 교관들은 일차적으로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유교이념과 예절들을 교육하였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또한 향약(鄕約)을 중심으로 하여 향교의 교육목적 가운데 하나인 화민성속(化民成俗)을 위해 지방의 민풍 교화에 힘썼던 것입니다.

  이상에서 향교는 국가가 관리하는 교육기관이자 교과과정의 난이도 면에서는 성균관보다는 한 단계 낮은 수준이고, 서당보다는 한 단계 위의 오늘날 중등 수준의 교육기관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 참고문헌:  조선시대 교육기관의 실제와 현대적 시사점 연구(한민석,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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