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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론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육이론 ①(인간관, 정치적 공공성, 자아실현)

by 신박에듀 2020.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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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에듀몬입니다. 플라톤의 철학과 비교대상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서양 교육사의 빠질 수 없는 인물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그의 스승 플라톤의 관념론과 달리 실재론의 입장에서 우주를 설명하였습니다. 실재론은 이데아만이 실재한다는 관념론의 관점을 거부하고 우주가 형상(이데아)과 질료(실재하는 것)로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육이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인간관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은 개별적 실체들에 공동 본질로 내재하고, 현실 세계의 개별적 실체들을 통해서 항상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형상과 질료는 불가분의 관계로 보편적인 성격의 형상이 발현되는 것은 구체적인 질료와 항상 관계되어 있습니다. 자연적인 생성은 형상이 질료 속에 내재하여 스스로 실현함으로써 일정한 실체를 생성합니다. 도토리라는 질료 속에 도토리나무의 형상(가능태)이 내재하며 자라난 도토리나무는 형상이 자기를 실현한 상태 (entelecheia)입니다. 엔텔레케이아는 가능성으로서의 질료가 형상과 결부하여 현실성을 획득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현실태(現實態) 또는 에네르게이아 와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즉, 잠재적 가능성이 최상으로 실현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현실화된 형상은 다시 일정한 가능성을 지닌 질료가 되어 내재적인 다음 단계의 형상을 실현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결코 움직여지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부동의 원동자인 궁극의 원리, 궁극적 목적이 있습니다. 결국 모든 존재는 그저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을 목적론적 우주관이라고 부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을 관찰하고 설명하는 데에 중심적 개념은 엔텔레케이아였습니다. 이는 모든 생물은 자기 자신 안에 삶의 목적과 목표를 지니고 있으면서 내재된 합목적성과 목표지향에 적합하게 스스로 발달해간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영혼(정신)은 “자연적 유기 체의 본원적 엔텔레케이아”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삶의 개념으로 파악합니다. 삶의 원리로 이해된 영혼은 동시에 존재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영혼에 의해 인간은 개별적 특성을 지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 육체의 물질적 바탕은 영혼의 존재와 활동을 통해 개별적으로 구체화되기 때문에 육체, 즉 질료가 개별화의 근원이 된 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자신의 정신적 능력을 극대화함으로써 스스로를 유지하며 육체가 인간의 이성적 능력에 의해 규정되도록 합니다. 영혼은 정신적 능력이 진리를 인식해가는 과정에서 영혼과 육체는 물론이 거니와 그와 더불어 한 인간이 전인적으로 개별화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적 본성이 인간을 개별적 실체로 만들기 때문인데, 그 결과 질료적 개별성에 정신적 개별성이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영혼은 구체적으로 어떠할까요? 인간의 영혼은 식물적, 감각적 그리고 지적인 존재의 원리 또는 삶의 원리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식물적 영혼으로서의 인간은 육체적 삶을 가능케 합니다.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하며 번식하도록 합니다. 감각적 영혼으로서 인간은 감각적으로 지각하고 추구하게 합니다. 정신적 혹은 지적 영혼으로서의 인간은 인식하고 목표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영혼은 영혼의 세 계층을 총망라하면서 활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주도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은 인식을 추구하는 정신적 영혼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은 ‘정신적 영혼을 지닌 동물'이며 사회적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성으로부터 도출되고 또한 이성을 보완하는 인간의 사회성은 가정, 지역공동체 및 국가 모두의 근본이 됩니다. 그에게 있어 인간이란, 본성적으로 개별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그는 인간 이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활동을 통해 질적으로 높은 쾌감과 만족을 찾아내고 선택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으며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발현시키기 위해 항상 친근하고 질서 정연한 공동체적 삶을 연구하고 추구한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본래부터 교우관계의 욕구나 성적 욕구 같은 사회적 생존의 욕구에 대한 운동인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본성은 오로지 사회를 통해서만 발현될 수 있기 때문에 사회라는 것은 인간에게 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사회는 법질서에 의한 정의를 전제로 하여 실재하는 것으로서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행복한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선하고 올바른 삶이라는 도덕적 목적을 추구합니다.

  인간의 사회성을 가능케 하는 천부적 사교성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친애라는 덕목 하에 총괄하고 있습니다. 친애는 개인들 사이에서 지속적인 협동의 욕구를 내포하는 애정적 결합을 의미합니다. 친애의 최고 형태는 서로 평등한 사람들이 그들의 선량함을 바탕으로 서로 사랑할 때 나타납니다. 이러한 우정은 완벽한 합의에 의한 공동체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정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볼 때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갈등 이란 불가피합니다. 따라서 국가가 주도하는 교육을 통해 학습되고 적절한 강제에 의해 유지되는 정의의 법칙에 따라 사회가 조직화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간은 타고난 사회성을 지닌 존재이지만 교육을 통하여서만 그 사회성이 온전히 발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리스토 텔레스의 이러한 인간 이해는 교육의 필요성을 제시합니다. 인간 삶의 교육적 요소는 사회적인 요구에서 나오며 따라서 교육은 사회적 현상입니다. 그러나 교육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는 “정신적으로 관조하는 삶"입니다. 세계를 인식하려는 목적을 지닌 로고스야말로 인간의 본질입니다. 영혼으로서의 인간이 진정으로 지향하는 바는 윤리적 덕성을 통해 자신의 사회성을 실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 이해는 사회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정신적 차원으로 확장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학적 존재론 위에서 전개되는 철학적 사유는 그의 교육학적 사유의 근간이 됩니다.

  문제는 로고스와 정신적 행복이 결국은 행위하는 데에서 성립되기 때문에 정신적 관조라는 것은 실천적 삶 속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실천의 과정에서야 비로소 각성된 로고스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실천의 순간에서야 이성적으로 관조하는 삶이 사실로서 실재합니다. 그리고 실천과 이론적 관조를 통합하는 철학은 인간의 삶과 존재 전체를 추구하는 교육학이 됩니다. 그렇다면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본성(physis), 사회(ethos) 그리고 정신(logos)이 함께 함으로써 교육하는 일(paideusis)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학적 전제조건 아래에서 교육과 도야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타고난 본성과 사회적으로 습득되는 습관 그리고 정신적 통찰을 통해 선하고 도덕적인 존재로 성장합니다.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면의 바탕이 되는 본성은 양육을 통해 발달하고, 덕은 습관이나 훈련을 통해 형성되며, 정신적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 수업을 통해 지식을 획득합니다. 그러나 교육은 개인적 활동인 동시에 사회적 활동입니다. 인간은 국가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 태어나서 공동체를 보존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은 질서와 정의를 통해 공동의 생활을 가능케 하는 국가를 필요로 합니다. 국가의 이러한 공동체적 목적에서 모든 사람이 동일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나옵니다.

 

 

 

 

 

 

2. 정치적 공공성

 

  정치학은 윤리와 교육을 포함하는 것으로 모든 시민이 행복하게 사는 최상의 선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종합적 기술입니다. 한 국가의 덕과 선은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의도의 결과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본적으로 어떻게 하면 좋은 국민을 기를 수 있을 것인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국가란 자연적으로 존재하며, 개인에 앞선다고 믿었습니다. 국가는 전체이며 개인은 그 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인은 고립되어서는 스스로 만족할 수 없으므로 전체 국가에 모두 같이 의존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가만이 스스로 만족한 상태를 이룰 수 있습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공동체, 즉 전체의 일부가 되도록 되어 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는 어떤 공동체를 이루려는 잠재적인 충동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를 본질적으로 어떤 종류의 집합체로 보고 근본적으로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국가의 구성원들은 각기 다른 능력을 갖고 있어서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하고 각기 서로 다른 봉사를 교환함으로써 모두 더 높고 더 나은 삶을 이룰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국가는 서로 다른 요소로 구성되고 서로 다른 능력을 교환하는 것이며 국가의 안녕은 그 구성요소들이 각기 다른 봉사를 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국가의 특성 때문에 교육의 필요성이 더욱 강조됩니다. 교육은 서로 다른 사람들의 개성과 재능을 살려 국가에 기여하고 봉사하게 할 뿐 만 아니라 이 집합체를 공동체로 만들고 그것에 일체성을 주는 수단으로써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정치 질서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가장 훌륭한 것은 시민을 그들 정치질서의 정신으로 교육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치적 진보에 목적을 두는 모든 입법가(立法家)의 일차적 업무는 입법을 가능하게 하고 사유와 행동 방식을 국민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이며 이상적 국가에 관한 미완성 유고에서 시민의 교육 계획이 그의 첫째 관심사이고 참으로 유일한 관심사인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특유의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아동기부터 명확히 훈련받는 것의 중요성은 좋은 교육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학생은 정체가 어떤 것이든 폴리스(Polis: 도시국가)의 선량한 시민이 되도록 훈련되어야 하고 그 헌정(정체) 정신을 교육받아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폴리스를 많은 성원들의 집합체로 부르고 교육이 그 집합체를 공동사회로 전환시켜 통일성을 부여하는 주요한 수단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폴리스의 목적은 단순한 삶이 아니고 양질의 삶이며 정체(헌정)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최선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은 하나이고 누구에게나 같아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오직 시민의 공동 이익을 목표로 삼는 정치만이 참된 정치이듯이 개인을 전체 사회의 일원으로 육성하기 위한 교육이어야 하므로 교육은 국가의 계획과 국가의 통제 하에 공적(public)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한 국가의 안정성은 다음 세대에게 주어지는 교육의 종류에 달려 있으며 어린아이들이 같은 형식으로 교육될 때 불평 없이 고통을 인내하는 것을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사교육은 빈부의 교육차를 초래하여 국가에 해가 되며 재산, 부, 명예 및 시민의 욕구를 평등화해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덕을 갖추는 것이 필수 불가결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시민이 덕을 교육받는 것은 최선의 사람이라는 국가의 본성적 목적에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한 사회가 훌륭한 가치로 인정하는 덕목들을 행하는 것은 그 사회 구성원 각자의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하며 사회적으로 유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이 법에 의해 규제되고 국가에 의해 관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국가는 단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훌륭한 삶을 위해 존재하므로 좋은 국가라면 시민들의 탁월함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은 그의 교육의 공공성 논 증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교육이 국가를 통일체로 만든다고 할 때, 그 통일성의 토대로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하는 것은 한편으로 시민들 간에 우애와 상호 선의 및 신뢰를 가지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 각자가 국가의 본성적 목적, 즉 최선의 삶을 살려는 목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의 목적이 생존만이 아니며 더 나아가 좋은 생활의 질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부와 자유는 국가가 단순히 존재하는 데 필요한 것이며 정의와 용기는 국가에서 좋은 생활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요소입니다. 또 교양과 선은 좋은 생활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의 교육관의 기저에는 이상적 사회, 이상 국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교육은 개인이 행복할 수 있는 국가 시스템에 맞는 이상적 시민 양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화와 여가는 주체가 다를 뿐 국가와 개인이 추구할 궁극적인 목적이자 행복을 위한 필요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이상 국가에서의 시민의 참된 훈련은 선량한 개개의 사람의 훈련과 같이 지고의 이성을 최종 목적으로 하는 훈련이어야 합니다. 이성은 고도의 명상으로 시간을 보내는 여가를 뜻하며 평화를 뜻합니다. 또 아름답고 선량한 것의 선택을 의미합니다. 지고의 이성 계발에 관한 그의 교육 목적관은 스파르타 교육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파르타가 여가를 이용하는 방법, 즉 평화롭게 사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몰락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3. 자아실현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육론은 그의 형이상학 이론과 일맥상통합니다. 플라톤은 사상의 실재를 관념에서 찾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생각을 수정 보완하여 실재를 관념 그 자체에서 찾지 않고 뚜렷한 개별 존재에서, 특히 내부로부터 독특한 형식이나 관념을 발현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존재들에서 찾았습니다. 실로 그 발현의 한 측면에서 교육은 바로 자아실현의 과정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로 이성은 인간이 결정하는 형식이나 관념입니다. 시초부터 작용하고 있는 인간의 내부에서 궁극 적으로 그 자신을 나타내어, 성장의 진로를 재촉하고 인도하는 것이 이성인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을 사회적 측면과 개인적 측면의 두 부분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사회적 측면은 정치 기술에 종속하는 기술자로서의 측면을 지칭하는 것이고 개인적 측면은 내부로부터의 계발에 의한 자아실현 과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의 주제의 주요한 논의가 정치이론의 탐구과정에서 생겼다는 사실은 그가 사회적 측면을 더 중요한 것으로 간주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나 사실의 관점에서 그가 말한 대부분의 것은 사회적 측면보다 오히려 개인적 측면에 대한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육은 조각가의 직업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교육에는 4 원인이 있다.

첫째, ‘무엇으로부터’로 이는 질료를 의미하며 ‘질료인’이다.

둘째, ‘무엇으로’로 이는 조각의 내적 형상 또는 본질상을 의미한다. 조각가가 재료로부터 그의 내심에 언제나 이미 가지고 있었던 형상을 조각해 내듯이, 교육자가 학생으로부터 형성해 내는 인간상을 의미하며, ‘형상인’이다.

셋째, ‘무엇을 위하여’로 이는 그렇게 교육하는 교육 행위의 목적을 의미하며 ‘목적인’이다.

넷째, ‘무엇을 통하여’는 조각가의 조각 방법을 의미하며 ‘작용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을 이렇게 질료와 형상의 사이에서 시도되는 기술로 파악하였습니다. 그러나 기술로서의 교육에는 분명히 일정한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의 생명체가 그 싹 안에 주어져 있는 성장의 계획과 질서에 따라서 지극히 자연스럽게 유기체적 발달을 한다는 의미에서처럼, 소크라테스가 그 자신의 내적 성장 질서에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성장 발달은 결코 저절로 형성되고 완성되는 자연적인 과정으로 파악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연에 있어서 질료는, 없는 가운데서 외적 성장을 위하여 마련되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적은 외부 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제나 이미 안에서부터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부로부터 가하여지는 것으로 본 작용도 생명체가 자신의 성장을 위한 자극을 받을 때에 언제나 동시에 그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성장의 작용이 함께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생명체에서 ‘무엇으로부터’와 ‘무엇으로’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다시 말하면 질료와 형상을 구별할 수 있음은 질료와 형상이 언제나 이미 구체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함께 형성되고 이러한 공동 형성의 자아 운동 안에서 생명체가 자아를 실현할 경우에 한하여서라고 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처럼 만물의 형성 문제에서 인간의 발달과 교육의 문제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후에 라이프 니츠(G. W. Leibniz)를 통해 독일 고전주의의 도야 이론에 수용된 유기체적 도야의 개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정리하면, 모든 생명체는 자신이 무엇으로 되어야 할 것인지를, 즉 형상(eidos)을 이미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성장하는 데에 자신의 본질에 위배되는 그 어떤 일도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인간이 무엇으로 되었다고 말하지 그가 무엇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가능성이란, 그것이 실현되는 데에 서야 비로소 가능성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술 『동물 분류론』에서 한 개체의 생성이란, 그것의 존재형식을 통해 결정되는 것이지 역으로 존재형식이 생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으로부터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그 어떤 중립적 소질이나 성향은 없습니다. 어떤 생명체가 자연적으로 타고난 소질에는 그 생명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을 지향하는 삶의 일정표가 이미 들어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마치 알면서 행하는 존재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연은 때때로 본성이 원하는 바에 뒤쳐져서 자신의 능력을 행하지 못하는데 그럴 때에 자연과 기술 사이의 유추가 효과 있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역시 교육은 기술로서 자연이 남겨 놓은 틈을 메워주고 자연의 수단을 통해 자연을 지원하고 도와주는 일, 즉 자연을 모방하는 과제를 갖습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혼자서 자연적 발달에 도달하는 다른 생명체에 비해 자신을 형성해 나가는 데에 특별히 위협을 받고 있으며 출생 시에나 그 후 교육에 있어서 여러 가지 기술적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만약 기술이 자연을 도와준다면, 기술은 자연이 완성시키지 못한 채 남겨둔 것을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육을 계획할 때에 우리는 자연의 구분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기술과 교육이란 단지 자연이 남겨놓은 빈틈을 메우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 참고문헌: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과 교육론을 통해 본 행복교육 고찰(최민,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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