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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탐구

농촌지도의 변천사 알아보기(조선시대~현재)

by 신박에듀 2022.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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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신박에듀입니다. 최근 농촌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함에 따라 과거 특정 연령층에 국한되던 농촌 산업 종사자의 연령대가 매우 다양해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우리나라 농촌지도의 변천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농촌지도 태동기

 

  우리나라 농촌지도의 시작은 조선초기라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면마다 권농관(勸農官)을 두고 씨뿌리기와 김매기 등을 독려하였으며, 권농관으로 하여금 각 지역의 씨를 뿌린 면적을 중앙정부에 보고하여 세금을 부과하는 기초자료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권농관의 활동은 시기에 맞게 씨뿌리기와 김매기를 독려하는 것이었지만 당시로서는 한 해의 농사의 성과를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일본에 의해 좀 더 과학적이고 교육적인 농촌지도가 이루어졌으나 이는 우리 나라의 농촌발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식량수탈을 위한 생산성 증가가 목적이었던 것으로, 최민호(1995)는 해방 전‧후를 나누어 일제강점기의 농촌지도를 ‘준(準)농촌지도’라 하고 해방 후 미국에서 도입된 농촌지도를 ‘진(眞)농촌지도’라 하였습니다. 즉, 현재의 우리나라 농촌지도의 근간은 미군정 시대에 미국으로부터 도입된 농촌지도라 볼 수 있습니다.

 

 

2. 농촌지도 준비기

 

  광복 후 과도적 성격의 미군정은 농지개혁과 농업생산력 확보를 위해 미국식 농촌지도사업을 남한에 도입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47년 농업기술교 육령을 공포하였고 이 법에 따라 농과대학과 농업연구 그리고 지도기능을 통합한 농사개량원을 개원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근대적인 미국식 농촌 지도의 시작입니다.

  우리나라 농촌지도 발전 과정 중 준비기에 설립된 농사개량원은 농사시험장, 문교부 산하의 농과대학(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중심으로), 농사교도국을 통합하여 만든 조직으로 연구‧교육‧지도 기능을 수행하였습니다. 농사시험장은 농무 부 소속에서 농사개량원 산하기관으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은 문교부 소속에서 농사개량원으로 소속이 변경되었습니다. 그리고 농사교도국은 기존에 존재하지 않은 조직으로 새로이 신설하였습니다. 당시 농사개량원에 속한 농사교도국의 주된 업무는 농사에 대한 지식과 기술보급을 통한 식량증산과 이를 통한 농민생활의 향상으로 군(郡)의 농사교도사(農事敎導師)사가 농촌의 주민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며 업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농사개량원은 행정과 분리‧운영되어 교육적 성격의 지도사업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문인력의 부족, 행정지원의 부족, 예산의 부족, 미국식 농촌지도이념에 대한 이해 부족 등으로 조직이 유지가 되지 못하고 약 1년 뒤인 1949년 농업기술원으로 개편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방적이고 강제성을 띤 일제강점기의 농촌지도를 벗어나 민주적 이고 교육적인 미국식 농촌지도를 처음 시도해 보았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1949년 1월 시급한 식량증산의 문제를 우리의 실정에 맞는 농업연구와 지도기관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농업기술원이 발족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농사개량원에 소속되었던 농과대학이 문교부 산하로, 연구와 지도사업은 농림부 관할로 변경됨에 따라 농촌지도의 관료적 성격이 강화되었습니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농업기술원 교도기구의 기능은 사실상 마비되었습니다. 그러자 농림부는 내무부와 국방부의 협조를 얻어 1952년 농업교도요원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중앙에는 농림부 직속의 ‘농사보급회’를, 지방에는 ‘농사보급회’ 읍면 지부를 설치하여 행정적 지도조직을 만들었습니다. 농업교도요원제도에 의해 선발된 농업교도요원들은 각 부락에서 선발된 사람들로 무보수 명예직이었으며 농사교도의 책임을 지고 있었고 징용의무의 면제를 받았습니다. 이들의 주요 업무로는 농사개량, 협동조합육성, 청소년 지도 등이 있었습니다.

  1956년 ICA(한미국제협력처)의 초청으로 방한한 메이시(Macy) 일행은 한국의 농 촌지역을 방문하고 메이시(Macy) 보고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한국정부와 미국 원조 당국 간에 농사교도사업 발전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고, 이 협정에 기초하여 1957년 농사교도법을 제정하여 농사원을 설립하였습니다. 농사원은 농업의 개량발달과 시험연구 그리고 농사 및 생활개선에 관한 지식과 기술을 지도하여 식량증산과 생활향상이라는 목적하에 기술보급지도 시험 연구를 광범위하 게 시행하였습니다. 연구사업과 교도사업을 단일행정체계로 묶고 농업 행정과 이원적으로 진행한 지도체계를 농사원의 교도사업으로 일원화하였습니다.

 

 

 

 

3. 농촌지도 도입기

 

  농사교도법에 따라 1957년 ‘농업연구 및 교도공무원 자격규정’을 공포하여 농사연구 및 교도사업을 행하는 공무원의 자격규정과 자격검정 시험규정을 제도화하였습니다. 이 규정에 따른 농업연구‧교도공무원의 자격은 농과대학 졸업자로 응시자격을 제한하고 현직자에 대한 자격시험을 실시하며 교도이념과 방법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도록 하여 다른 공무원과는 구분되는 농촌지도 공무원 제도가 마련되었습니다. 즉 농사교도법에 의해 우리나라의 농촌지도는 행정과의 분리, 민주적‧교육적 성격의 지도사업체계를 제도적으로 보장받게 되었고, 이를 통해 비로소 현대적 농촌 지도사업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상게서). 농사원의 교도공무원의 주요업무는 거름 주기, 못자리, 품종 등의 전시포 운영, 부엌개량, 작업복 제작 등의 생활개선사업, 그리고 농민지도와 청소년 조직체인 4-H 훈련 및 교육 등이었습니다.

 

 

4. 농촌지도 발전기

 

  농사원 개원과 함께 교도사업을 일원화하였지만 실제 농촌지역에서의 교도사업은 농사원의 교도사업 이외에도 지역사회개발사업, 농림행정기관의 교도사업, 농업단체(농협중앙회, 토지개량조합관련 조직)의 교도사업 등이 계속하여 존재함으로써 농촌지도사업은 농민들에게 혼란과 거부감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다원적인 농촌지도사업의 폐해를 극복하고 일원화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1962년 농촌진흥법 을 제정하였고 이를 근거로 지역사회개발사업과 농사교도사업이 통합된 농촌진흥청이 설립되었습니다. 식량자급달성을 최우선 목표로 삼은 농촌진흥청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상향식 농촌지도사업 계획수립 방식을 하향식으로 변경하였으며 읍‧면 단위마다 지도소 지소를 설치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농촌진흥청 체제는 큰 변화 없이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 출처: 평생교육학적 관점으로 본 농촌 지도사의 정체성과 역할 연구(김정민,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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